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산소, 물, 음식이다. 그 다음은 올바르게 잠들어야 할 공간. 그것이 충족이 되면 성욕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기본적인 욕구들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안전과 쾌락이 충족되면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하게 될까?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앞서 언급한 기초적인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가족과 친구를 이루고 싶고 단체에 소속되고 싶다. 곁에 자신의 사람들이 생기고 단체 속하게 되면 타인의 존경을 원하게 된다. 자신이 행하는 것에 대해 인정받고 그것으로부터 명예를 얻고 싶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가치 있는 것을 이루고 나면, 인간은 깨달음의 단계를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 단계 자아실현의 단계이다.
'나는 누군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고, 무엇으로부터 살아가는지 혹은 자신의 자아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은 애정과 존경, 자아실현의 단계 속에 머문다. 예술을 통해서 비슷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타인의 존경을 받기도 한다.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예술은 인간의 욕구 범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누릴 수 없게 된다.
당장 먹을 것이 없거나 집에서 쫓겨날 상황이라면, 예술을 누리기 힘들다. 그런데 21세기는 기본적인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된다. 그곳에서 더 많은 욕구를 위해서 발버둥 칠 뿐, 예술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여건은 충분하다.(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버이날, 장모님과 엄마를 모시고 부산 아트 페어 행사를 갔다. 미술계에서는 큰 행사로서 많은 갤러리와 화랑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몇 시간을 돌아 봐도 모자랄 정도로 작품이 많았다. 최근에 미술 작품을 잘 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장모님과 엄마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작품들을 응시했다.(덕분에 아내만 고생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을 짜릿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든 좋은 것이 있으면 좋지 않은 것이 동반된다.
작품을 진지한 태도로 응시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로 작품을 하나의 유희거리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르지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에서의 예의는 필요하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응시하기보다 타인에게 '미술 작품을 보러 온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으로 거대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잡으며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작품을 응시하고 싶은 관람자에게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이날은 작년 서울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때 느꼈던 불편함과 동일했다.
누구 한 사람 오라는 이도 없었고, 축음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양악에 귀가 익숙해져 이제는 판소리에 몇 시간씩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사정이 판석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소리청 마루 한편에 앉아 햇볕을 쬐면서 다시 곰방대에 담배를 채웠다. 수련이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느라 두드리는 북소리가 두둥 딱, 들려왔다.
염부, 박이선
외국 작가의 특별한 작품을 구경하려는데,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작품에 흥미가 있던 나는 당연하게도 작품을 응시할 수 없었다. 계속 기다렸지만 사람들은 돌아가며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결국 작품을 응시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미술 작품에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중 4단계, '성취의 욕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욕구 3단계, '인정의 욕구'에서 한 단계 앞을 나아가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신이 미술 작품을 응시하며 많은 것을 느끼는 욕구 4단계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인정의 욕구는 사진과 영상으로 남을 수 있지만, 성취의 욕구는 자신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활동하는 클래식 필라테스는 4단계 '성취의 욕구'와 5단계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강사들이, 스스로 성취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동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미술 작품들을 화려함으로써 다가가는 사람들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어려워 보이는 동작 화려해 보이는 동작을 해내는 자신의 모습에 심취해 있는 경우가 흔하다.
대다수의 스포츠는 경쟁을 통해서 결괏값이 만들어진다. 축구는 상대방보다 많은 득점을 해야 하고, 배드민턴은 바로 너머에 있는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필라테스는 그렇지 않다. 필라테스는 스스로에게 집중한다. 리포머를 탄다면 리포머와 한 몸이 되는 감각을 느껴야 하고 매트를 행한다면 자신의 움직임의 감각과 속도에 집중해야 한다. 캐딜락, 운다체어, 하이체어, 암 체어 등 2차 도구들을 사용할 때는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에 대한 보완으로서 다가가야 한다.
자유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만족해하는 바보가 되느니 불만족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바보가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한 쾌락을 자신의 사유를 통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사, 나이절 워버턴
필라테스는 어느 것도 타인과 경쟁이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속도와 리듬 그리고 감각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바디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더 높은 움직임은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적절한 준비가 되었을 때 더 높은 움직임을 도전하는 것과 다르다. 바디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높은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은, 미술 작품을 응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 욕구에 매달려 미술 작품 앞에서 화려하게 사진을 찍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을 대할 때는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필라테스를 대할 때는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오직 화려함에 취해 타인보다 더 인정받는 인간이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진정한 필라테스가 아니다. 인정 욕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예술로서 가치는 나올 수 없듯이, 인정 욕구에만 매달려서 움직인다면 올바른 가이드를 할 수 없다. 타인을 가이드 할 때, 움직이는 사람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가이드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 욕구'만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을 대하는 방식에는 자유로움이 포함된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든 그것은 자신의 방식이다. 인정의 욕구에 머물러서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방식 때문에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는 이해받을 수 없다.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자유는 있지만 타인의 자유를 방해하는 자유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권리이다.
필라테스도 마찬가지다. 인정 욕구를 원하는 강사의 방식으로,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자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필라테스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감각에 집중하는 '자기 주도성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움직임'을 가질 권리가 있다.
프랑스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는 영화 '봄 이야기'에서 인간의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한다. 잔느, 나타샤, 이고르, 이브 모두가 각자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인정을 원한다. 철학 선생님인 잔느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타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 이고르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 이브는 사랑받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각자가 원하는 요구가 뒤섞여 관계를 표현한다.
우리는 미술과 필라테스를 인정 욕구로서 임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되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로서 자아실현에 가까워질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필라테스로서 자아실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을 하지 않아도(친구 아버지와 만남을 가지는) 칸트의 이성 작용을 통해 자신에게 집중한 잔느가 이고르의 만남을 거절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