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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직한연필 Jun 04. 2024

스트레스 내성 키우기

죽은 척하기 


아침 출근길 광역 버스 안, 버스의 종점이자 승객의 대부분이 하차하는 사당역을 정거장 앞두었을 때, 내 앞자리에서 뭔가 '쿵'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피더니 바닥을 쳐다본다. 나도 뭔 일인가 싶어 여자의 시선을 쫓아 바닥을 바라봤다. 

여자는 하차 준비를 하느라 짐을 챙기던 중 들고 있던 텀블러를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삽시간에 커피가 줄줄 흘러 버스 바닥에 몇 가닥 강줄기가 그려졌다. 커피 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바닥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황한 여자는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인다. 


하차 직전에 뒤늦게 사실을 알아챈 버스 기사는 '이게 뭐예요?' 하고 뒤에 승객들에게 묻는다. 누가 그랬는지 자진 신고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당황한 여자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어쩔 줄을 몰라한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커피를 쏟은 여자도,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발견한 기사도 난처하고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쏟아진 커피, 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오늘은 별것이 되어 그 여자와 기사의 아침 기분을 망쳐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실수 하나에도 우리는 이렇게 당황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지만 커피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돈을 쏟거나 건강을 쏟고, 시간을 쏟아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더욱 처절해지고 비참해지겠지. 


사과 몇 마디에, 고개 몇 번 숙이고 버스에서 내리면 그만인, 쏟아진 커피 때문에 어수선해진 버스 안에서 나는 조용히 '다행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속으로 이러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쏟아지듯 이동하는 무리에 섞여 지하도로 걸어 들어간다.


오후 4시,

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컴퓨터 화면에 메신저 창이 뜬다. 


여보 


남편이 보낸 메시지다. 본론부터 얘기 안 하고 ‘여보’라고 나를 먼저 부르는 것을 보니 뭔가 분위기가 싸하다. 필시 무슨 안 좋은 일이거나, 남편이 내게 무언가를 부탁해야 할 때 주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급한 일인가 싶어 바로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여보, 


과태료 고지서가 날아왔어


지난주에 남편이랑 영화를 보러 간 일이 있다. 내가 퇴근길에 근처 전철역에서 내리면 남편이 나를 승용차에 태워 영화관으로 가기로 했는데, 그날 마침 남편이 나보다 약간 먼저 도착하여 갓길에 잠시 정차를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누군가 남편의 차량 사진을 찍어 신문고 앱으로 주정차위반 신고를 했나 보다. 


정차 시간 1분 20초. 과태료 고지서를 보니 1분 단위 두 장의 사진이 찍혀있다.  누군가 초조하게 맞은편에 서서 우리 차량을 주시하다 정차할 때 한 컷, 1분을 넘겼을 때 한 컷, 이렇게 두 장의 사진을 건졌을 것이다. 


통신사 멤버십에서 한 달에 영화 한 편은 공짜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혜택이 있어서 내 영화값은 아낄 수 있으니 남편이랑 둘이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이었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 비싼 값을 치르고 영화를 보게 된 셈이다.


한참 일하다 말고, 그것도 하루 중 근로자의 피로도가 가장 높아지는 오후 4시, 남편에게 온 메시지는 유쾌하지 않았다. 잠재되어 있던 짜증이 조금씩 올라온다. 


버스에서 커피를 쏟은 일도 과태료를 내게 된 상황도 어떻게 보면 참 사소하지만, 적잖이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살면서 몇 방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힘든 일들을 겪다 보니 ‘이 정도 일쯤이야’ 이렇게 너그러워질 만도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착각일 뿐이다. 큰 타격을 먼저 겪어 봤다고 해서 가벼운 여러 번의 잽[jab]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리고 때론 사소한 스트레스가 불러온 가벼운 여러 번의 잽[jab] 때문에 무너지기도 한다. 


스트레스는 비단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 내성 식물[stress tolerant plant]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식물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일부러 식물의 생장을 느리게 하여 오래 버티는 것을 이른다. 수분, 영양, 빛 등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척박한 상황에 놓인 식물 중에는 이것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는 것도 있다.


나 역시 스트레스 내성을 갖기 위한 방법이 하나 있다.

일명 '죽은 척하기'이다.


나는 가끔 너무 힘든 일이 내게 닥치거나, 때론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내게 다소 부담을 주는 일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죽은 척하기'를 떠올린다. 상황이 복잡하거나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일 일수록 최대한 마음의 긴장을 낮추기 위해 ‘죽은 척 하기’를 시도한다. 죽은 척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몰입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내 이성과 감정을 갉아먹지 않도록 '나'에게 집중하지 않는 방법이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으므로 아픔, 고통, 괴로움을 느낄 수 없다. 물론 죽은 척한다고 해서 갑자기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척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멀어질 수는 있다. 

마치 우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듯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와 거리를 둔다. 우물에서 비쳐 찰랑 대며 흔들리는 내 얼굴은 나의 얼굴이지만 진정 '나'는 아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도 고통의 시간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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