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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May 29. 2020

044

  폭격을 맞은 상태로 깨어나는 날이 있다. 그럼 그날은 재난이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이틀 전에 사 놓은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땀 흘리며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며칠 전 손빨래 하다가 세제에 상해 물집 잡힌 손에 핸드크림 덕지덕지 바르고, 발톱을 바싹 깎았다. 기워야 되는 양말은 못본척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훔치고 세탁기를 돌렸다. 미팅 장소가 가까워서 외출하고 돌아오니 딱 맞춰 세탁 완료. 빨래를 널면서, 아, 지긋이 유지되던 일상이 지긋지긋하다, 싶다. 

  요즈음 읽는 책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인데 진도가 느리다. 오늘도 겨우 표제작 하나를 읽었을 뿐이다. 거시적인 배경 속 인물들의 거시적인 감정. 그러나 내가 머무르는 공간과 그 속에서의 내 감정은 너무 생활밀착형이어서 괴리감. 초라하고 보잘것 없지만 오늘하루 내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한 이 기분을 남겨두고 싶었는데 어떻게 적당히라도 바꿀 몇 개의 단어, 몇 줄의 문장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빈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사실 온통 비속어 뿐이었는데, 욕지거리를 쓰더라도 있어보이는 글로 공글릴 자신은 없었다. BGM으로 누자베스를 깐다고 뭐, 글이 힙해지나. 냉장고는 텅 비었고 때되면 끼니는 챙겨야 되니까, 결국 그걸 핑계로 비워내야 할 곳도 채워야 할 곳도 내버려둔 채 일어났다. 지하철 한 정거장 걸어 에코백에 식빵 두 덩이 담아 돌아오는 길, 정부재난지원금 9천원이 차감되었다는 메시지를 읽으며 집으로 멀리 에둘러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해가 떨어지는 중에 그믐달은 벌써 뜬 하늘, 붉고 푸른 기운이 마블링처럼 뒤섞이는데 천변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걷고 걷는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각자의 사정이 다르더라도 누구에게나 삶이 지겨운 순간이 있을텐데, 그 순간이 찾아오는 빈도가 나만큼 잦은지 궁금하다. 인생 n회차 마냥 애늙은이 같다는 이야기를 듣던 아이는 이미 십여년 전부터 생물학적으로 늙어가고 있다. 재생능력, 회복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지금, 자주 짓는 표정이 디폴트가 되어 노인의 얼굴에 궤적처럼 남으려나. 마른 세수를 하면 자글자글 주름마다 후두둑 떨어지는 감정의 각질들, '아이고 무료해', '아이고 지겨워', '아이고 의미없다'. 얼굴에 핵노잼이라고 쓰인 할머니. 개그를 다큐로 받는 할머니. 실버타운 인기 최하위 할머니. …그거 진짜 재난이네. 위험에 대한 경고도, 올바른 방법에 대한 안내도, 극복을 위한 응원과 지원금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재난-내 세포들에만 전염되는 팬데믹.

  그저께는 특별한 경험, 남다른 일상, 드라마 에피소드 같은 극적인 사건들을 쓰는 사람들이, 어제는 평범하고 흔한 순간들을 매력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그리고 오늘은 손바닥만한 글이라도 매일 써내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현생의 오르내림에 구애받지 않고 쓰는 행위를 밥 먹고 잠 자듯이 생활화 한 사람들. 

  어쨌든 오늘도 잘 버텼다. 폭격 속에서 깨어났지만 잠들기 전에 폐허를 대충이라도 수습했으니 됐다. 잘 먹고 잘 자고 오늘의 할당량을 그럭저럭 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대하는 관점과 자세가 달라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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