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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Jun 24. 2020

045. 소강상태, 장마

  경비행기가 이륙해 급히 고도를 높인다. 중력을 거스르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만드는 날카로운 경사 속에서 느끼는 약간의 공포와 약간의 기대감. 창밖을 바라보니 아래는 그저 망망대해다. 고개를 돌려 떠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숲과 건물과 항구가 있는 섬은 화마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 난 불타오르는 대지에서 달아나는 중이다. 마치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주인공처럼. 가까이에 착륙할 곳이 있을까. 하늘은 쾌청하고 바다는 청명하며 저 땅은 곧 잿더미가 될 것이 분명한데, 오로지 나만 확신이 없다. 


  6월 초에 꾼 꿈이었는데 아직도 선연하다. 해몽에 관심 많은 친구는 대박이라며 로또를 사라고 했다. 그러나 복권에 설레지 않는 성정이라 꿈은 그저 꿈대로 두었다. 그랬더니 로또 1등 대신에 다른 대박이 찾아왔다. 일 폭탄. 1월에서 5월까지의 작업량과 6월 한 달의 작업량이 비등할 정도였다. 아침저녁주중주말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쏟았고 마감 일정에 맞춰 일상이 돌아갔다.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드디어 찾아온 소강상태. 와- 그와 동시에 장마가 시작되었네. 바깥은 지금 요란하게 비가 내린다. 장마 첫날의 난 오전 회의 하나를 끝내고 충무로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중이다. 더없이 바라던 순간. '일'을 위해 카페인 수혈을 목적으로 급히 들이키는 커피 말고, '삶'을 위해 한 모금씩 곁들이는 커피. 이렇게 커피로 나의 워라밸을 측정할 수 있는 거다. 챙겨 온 크레마는 공교롭게도 배터리가 11%라 독서는 힘들겠지만,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음악은 실컷 들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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