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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 Sep 01. 2022

귀엽다라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지, 박하

30분 이야기 - 박하

언제나 저는 위인전보다 동네 친구들과의 술래잡기, 신기해 보이는 가게에서 만난 사장님들과의 짧은 이야기들로 인생을 배워왔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세상 밖으로 더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우리 30분만 이야기합시다.



2022.08.21. 09:00 빠이 어딘가의 카페


공항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여행자라고 쓰는 그는, 본분에 맞게 올해 3월부터 줄곧 여행중이며 지금은 태국 빠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자주 사진 찍고 글을 쓰고 사람도 만나며 지내는 듯 했다.

그를 알고 지낸 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늘 자라는 사람이었다. 자주 세상을 향해 욕하지만 그 속의 대상과 시각은 단일한 적이 없었다.

추측하건데,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높은 확률로 세상을 바라보는 박하만의 태도와 애정을 이뻐여길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지금 여행을 하며 글을 쓰는 일이 너무도 그의 일이라 박하의 현재를 30분 이야기 한 켠에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Q. 요즘 어떻게 지내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다.


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늘 하는 생각들이 다 비슷해서 생각도 안 하려고 노력한다. 불안, 용서, 화해, 사랑 네 가지를 중점적으로 보고 있는데, 불안은 어느 정도 생각 정리가 끝났다. 화해는 계속해야 할 것 같고, 사랑은 끌려다니는 느낌이고, 용서에 대해선 언제가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는 형의 10년 숙원 사업, 영화 <수영장> 프로젝트로 함께 태국 빠이에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열어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오고 가며 얘기하고 함께 밥과 술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 느슨하게 연결되는 곳이다. 나는 같은 감독의 <안경>이라는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일본 입국이 풀리는 대로 곧 일본 오키나와 요론섬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띵가띵가 놀 생각이다.  



Q.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을 하기 전과 후 삶의 변화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변화인가 궁금하다.


요즘 루틴은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틀고 운동과 산책을 한다. 책도 읽고 나른 나른하게. 요즘은 긴 글 보다도 짧은 일기들을 자주 쓴다. 그리고 또 집중할 때가 오겠지 생각하며.

올해 1년은 글에 전념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원래 생계를 이어가는 일을 하며 짬짬이 글을 써왔는데 올해는 정말 ‘글’만 쓰고 싶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다. 어디까지 쓸 수 있나 하는 스스로의 한계점과 수준을 확인해보고 싶다. 양으로 따지기 보단,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면 내가 계속 쓰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 알 수도 있을 것 같고.


글 쓰는 일로 생긴 변화라 하면, 더 조심스러워진 것. 이전에 빠듯한 일상에서 짬짬이 쓸 때에는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은 써버리는, 뱉어버리는 형식이 더 많았었는데 한번 더 곱씹어보는 시간이 늘었다. 질이 향상되고 있는 건지 게을러지는 건지 아직은 모르겠고, 다시 읽어보면 개선되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 세밀하게 들어가려고 하고.

또 하나는, 여행 중에 만난 여행자들의 바쁜 패턴과 속도 안에서 글을 쓰면서 나의 빠르기를 찾게 된 것 같다. 보통 일상에서 매우 치열하게 일하다 퇴근하고 여유롭게 글을 쓰기 위한 모드로 빠르게 전환되는 건 힘들지 않나. 여행을 하며 나의 속도를 찾은 점이 큰 변화이기도 하다.

얼마 전 누군가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물어온 적이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쉼은 기술이 아니라 요령인 것 같다. 무언가를 배워서 알게 되는 것 보다도, 이렇게 하는 건가 저렇게 하는 건가 조금씩 조금씩 부딪혀보며 알게 되는 부분 같다는 생각도 든다.



Q. 어떤 것이 박하를 계속 걸을 수 있게 하나.


어렵게 말하면 낭만적 비관주의. 비관적인 자세는 항상 힘을 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관주의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통념적으로 회의적으로 빠지거나 우울과 무기력으로 빠지게 되는데, 비관의 마음은 자조적인 냉소를 하거나 분노를 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 것 같다. 나는 분노의 편에 주로 서고, 그게 바로 낭만적 비관주의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일희일비하며 모든 것에 분노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 영역도 거를 수 있게 된 것 같다. 감정은 배제하고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 자기 연민과 자조에 빠지지 않고, ‘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Q. 그래서 낭만적 비관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세상은 언제나 거지 같고, 나 자신만큼은 품위 있게.



Q.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인간적인 유대. 한국의 정이랑은 다른 것 같다.

무척 느슨한 유대. 이건 사랑도 희생도 헌신도 아니고, ‘아,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지 않나?’라는 물음에 봉착한다. ‘그래도 너도 사람인데.’

우리가 구질구질하고 처절하고 찌질하게 싸우더라도 언제나 회복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느슨한 유대감이 있으면, 어느 인간에게든 기대를 갖지 않고, 실망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기대를 한다는 건 내 마음과 감정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나. 너무 건조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사람으로서 너를 존중해주고 있다는 감각. 결국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우리는 동질감도 있고 이질감도 있을 거라는 유대감 말이다.




Q. 마지막으로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 싶나.


아무 얘기도 하기 싫지만, 음, 나는 우주정복, 세계 정복? (웃음)

‘어떤 말을 하고 싶나’라는 이 인터뷰 질문이 누구에게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정보의 바다에서 선별해서 본인이 할 말을 하는 것.

입을 열었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정녕 너는 알고 있느냐?’ , ‘안에서 정돈되어 터져 나오는 말인가?’ 그것이 진심이라 생각한다. 나는 종종 침묵을 선택하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귀엽다.’

이 단어에는 누굴 평가하거나 판단의 지위도 없다. 표현의 단어 중 끝판왕인 것 같다.

예쁘다, 멋있다, 사랑한다라는 단어 모두 상대방의 답을 받아야 하는 단어들인데 ‘귀엽다’는 그저 듣고 흘려도 되는 최고의 단어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동물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귀엽다가 아닐까. 그리고 '잘하고 있다.' 이것도 귀엽다와 마찬가지의 의미 같다. ‘귀엽다’가 애정의 보조수단이라면, ‘잘하고 있다’는 어떤 응원이다. ‘자라고 있다’라고 들리기도 하지 않나. 너는 어떻게든 성장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거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30분 동안은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지 않나'의 심장으로 잠시 머물렀다. 나는 분명 인간인데 굉장히 낯선 기분이었다. 박하와 대화를 할 때는 자주 그렇다.

그럼 나는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었지? 무례와 혐오, 경쟁과 분열, 비교와 나태,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라던 몇일  서울대 축사를 듣고 따끔해서 멍하게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다시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냈다가. 그렇게 오늘도 지나갈 뿐이었다. 그저 귀여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 그의 글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박하의 브런치 (brunch.co.kr)

- 최근에 책도 냈는데, 았다. 워크  프리 : 네이버 도서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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