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D Day A D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윤 Jan 14. 2020

다시, 시작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던 정시 원서 조차도 실패를 겪자 나는 완전히 탈진 상태가 되었다. 부모님 앞에 죄인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염치없이 용돈을 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고 돈이 없으니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항상 방 안에서 뒹굴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부모님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대학에 모두 떨어졌기에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재수밖에 없었지만 도저히 내 입에서 재수를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처럼 또 공부할 자신이 없었을뿐더러 가정 형편상 부모님께서 쉽게 재수를 시켜주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수를 결심한 다른 친구들이 여러 학원을 알아보러 다닐 시간에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 계획도 짜지 않은 채 컴퓨터 게임만 했고 적어도 아버지가 계실 때만큼은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어머니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를 불러 재수를 시작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을 하셨다. 재수. 대학에 갈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자신 있게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웠다. 친구들이 다니는 유명 재수학원에 등록하고 싶어도 성적이 되지 않았고 다른 기숙학원에 등록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비용 때문에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과 함께 결정권을 부모님께 떠넘겼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께서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 선행반으로 다니고 있는 수원의 한 통학 재수학원을 추천해주셨다. 별로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고 거리도 꽤 멀어 왔다 갔다 하기가 어려워 보였지만 나에게는 딱히 거절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는 일단 알겠다고 했고 다음 날 우리 가족은 등록상담을 받기 위해 해당 재수학원에 갔다.               



 재수학원은 지하철 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름대로 시가지에 위치해있었다. 멀리서 학원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건물 1층에는 재수학원 등록을 상담받을 수 있는 창구가 잘 마련되어 있었다. 어딘가 답답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으나 여기까지 온 것을 이제 어찌하겠는가. 부모님과 나는 창구 직원에게 등록 상담하러 왔다고 말씀드린 뒤 안 쪽 상담 창구에 들어가 대기했고 학원생 등록 상담을 해주시는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깔끔한 양복 차림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출신학교, 나이, 목표로 하는 대학 등 기본적인 사항을 물어보신 뒤 마지막으로 수능 성적을 물으셨다. 부끄러운 마음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내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미리 챙겨 온 수능 성적표를 선생님에게 건네주셨다. 성적표를 보고 있는 선생님의 시선이 나의 온몸 부끄러운 곳까지 다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황급히 함께 챙겨 온 6월과 9월 평가원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내며 입을 뗐다.            


   

 "그래도 제 6평, 9평 성적이 ······."     

 "어, 근데 그건 모의고사잖아. 괜찮으니까 가지고 있어."       


        

 나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성적에 따라 내가 배정받은 반을 알려주시고는 하루 일과 등 간단한 유의 사항과 함께 앞으로 잘해보자는 간단한 격려를 해주셨다.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2월, 나는 재수 정규반에 등록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말의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