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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24. 2022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내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요즘은 예전보다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 영화관에도 거의 가지 않고 가끔 생각나거나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보고 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바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다. 꽤나 유명한 일본 영화인데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려고 할 때마다 그다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언젠가 보겠지 하고 미뤘다.



이 영화는 영화보다 책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방송실과 함께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그 당시 일본 소설이 인기가 많았는데 나는 일본 소설도 곧잘 읽곤 했다. 당시 일본 소설은 중학생이 읽기에 조금 야하고 사랑 이야기가 많았는데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꽤나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이상한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끝내 읽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 이 영화가 찾아왔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올해 들어 많이 했다. 이 영화를 내가 이제야 보게 된 이유도 지금의 내가 이 영화를 보기 가장 적당한 타이밍이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꽤나 지루한 영화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참으로 솔직한 사랑 이야기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지막에 츠네오가 "내가 도망쳤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나를 맴돈다. 결국 모든 말을 뒤로하고 모두의 사랑이 끝난 이유는 끝내 지친 누군가가 사랑으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부터 도망쳐서 현재에 이르렀을까. 솔직함으로 포장해 배려하지 못한 날들, 서툰 날의 모든 것들이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한 채로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영화에서 조제와 츠네오는 뜨겁게 사랑하고 담담하게 헤어진다. 언젠가 이 사랑도 끝날 걸 예감했던 조제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내가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미련한 미련을 털어내지 못하고 내 바닥까지 드러내며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돌아보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도망쳤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두들 그렇게 도망치며 살아가는 거겠지?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왔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도망친 모든 것들에 안녕이라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오래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저절로 성숙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솔직하고 또 성숙하다. 조제는 사랑이 언젠가 끝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그 사랑도 지쳤다. 감당하지 못하는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별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테니까. 츠네오는 자신이 도망쳤다고 엉엉 울지만 그는 알고 있다. 다시는 조제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제는 츠네오가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장을 보고, 밥을 먹고,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남겨진 사람, 도망친 사람 우리는 도망쳐 온 많은 것들을 지나 일상을 살아간다. 정말 힘들겠지만 버티고 살아가야 한다. 한때 우리를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했던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사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을 가끔 돌아보며 그렇게 살아간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처음에는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해가 간다. 작기만 하던 조제의 세계에 찾아온 사랑과 공포, 행복 모두 그녀가 지나갔던 것처럼 우리도 지나가야만 한다. 사랑을 등지고 끝내 우리는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저 순간의 진심과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꿈꾼다. 인간은 참 쉽게 잊고 쉽게 사랑에 빠지는 존재이니까. 그저 우리는 순간의 진심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을 날이 오지 않을까.




내가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있다. 서툴고 어린 날의 내가 하염없이 도망쳤던 곳은 사랑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인간은 한평생을 도망치며 살 수 없으니 가정을 이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라 나의 목표, 꿈, 이상, 현실 등 많은 것으로부터 도망치며 살아간다. 이 영화는 과거의 내가 도망쳤던 모든 것들에 안녕을 말하고 싶어 지게 만들었다. 지금의 내가 이 영화를 봐서 참 다행이다.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며 결국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남겨진다. 그 속에서 고통과 아픔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그렇게 자국이 남는다. 잘못한 사람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사랑에 빠지고야 마는 우리니까. 이제 우리는 홀로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 한때는 도망쳤고, 남겨지기도 했을 테니 그저 묵묵히 오늘의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평론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아 적어본다.


"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쳐야 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조제 뒷모습처럼, 종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길. " - 영화평론가 이동진



나도, 내가 도망친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내 삶이 때로는 누추하고 슬퍼도 그래도 오늘의 일상을 차곡차곡 살아가길






​2021년 6월 15일에 쓴 글

https://m.blog.naver.com/jhn1356/22239947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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