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는 날이면, 가장 첫 행선지로 서점을 택한다. 대청소를 앞두고 창문을 열듯이, 생각을 흘려보낼 바다를 찾듯이, 웅크린 마음을 담아낼 그릇을 찾듯이 책으로 향한다. 자못 신중한 얼굴로 수없이 늘어선 책등 앞에 서서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있는지 살핀다. 한 권, 두 권 뽑아 들었다가 다시 꽂기를 반복하며, 결국 그날의 책에 도착한다.
이번에 도착한 책은 박연준의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 원래도 박연준 시인의 글을 좋아해서, 신작이 나오면 심심찮게 챙겨 읽곤 했다. 하지만 시인들의 산문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꾸만 글 앞을 서성이게 하므로 시간이 많은 날 꺼내드는 게 좋다. 연차를 내고 하루가 통째로 비어 있었던 내게는 딱이었다.
책을 사들고 미리 알아본 카페로 향했다. 비가 오는 평일 오전이라 손님은 나뿐이었다.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와 따뜻한 라떼를 시켜 자리를 잡았다. 작은 가방에서 미리 챙겨 온 노트와 연필까지 꺼내면 준비 완료! 책을 펼쳐 들었다.
내가 높이 사는 멈춤은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머무는 일에 가깝다. 무언가를 더 하거나 덜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일이다. 움직임에서 벗어나 고요를 간직하는 일이다. 아이들이 하는 ‘그대로 멈춰라’ 놀이를 생각해 보자. 움직이던 아이가 가만히 멈춰 있기 위해서는 흔들리는 몸을 붙잡을 수 있는 힘, 노련함, 정지를 유지할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무용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동작을 빛나게 하는 건 멈춤이다. 멈춤 역시 ’춤‘이다. 모든 프로는 ’멈춤‘에 능한 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서 얼마 동안 멈출지, 어떤 상태로 멈출지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들 말이다. 멈춤은 자신과 상황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다.
_ 박연준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
요즘 나는 자주 울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돌연 눈앞이 뿌예져서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눈과 코가 모두 빨개지도록 울고, 다시 정상적인 얼굴로 돌아오면 밖으로 나갔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문제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멈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시작할 때만큼이나 멈출 때도 큰 용기가 요구된다. 내가 하루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회사에 큰일이 나거나, 될 일이 안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 스스로 믿게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내 곁에는 그 믿음을 내 안에 심고, 자라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마운 이들의 배려에 기대어, 하루 연차를 내고 쉬어가기로 했다. 휴대폰은 종료시킨 뒤 소파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에서, 그저 고요하게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우리는 무엇과 가까이 있을 때, 자주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그 생각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법은 간단하다. 거리를 둬보는 것. 나 역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당장 해결할 필요 없는 일, 대충 해도 괜찮은 일, 남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들이 ‘지금 당장, 내가, 잘 해결해야 할 일’처럼 보이면 우리는 속도 조절에 실패한다. 시야가 좁아지고, 스트레스에 취약해진다. 원래도 예민한 사람인데, 요즘 내 모습은 평소보다 더 뾰족하고 별로였다.
중심을 잡기 어렵다면, 중심을 잡기 어려운 상태를 그대로 기록해 보는 것이 좋다.
__ 박연준,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
조용한 카페에서 노트 위에 몇 바닥이고 써내려가던 시간은, 박연준 시인이 말한 ‘중심을 잡기 어려운 상태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보는 것’과 그 맥락이 같았다. 최근 심리상담을 받으면서도 느꼈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규정하는 사람이다. 그건 내가 나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자존감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그 자신에 의해 갇힌다니 웃긴 꼴이지만, 생각보다 자주 겪는 일이다. 규격 밖으로 걸어 나오면 더 많은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하면서, 내가 나에 대해 만들어둔 규격만큼은 부수고 해체하기가 어렵다.
‘나는 잘해야 해’, ‘완벽하게 해내야 해’, ‘기대에 부응해야 해’처럼 나 스스로 만든 관념과 의무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기적인 멈춤을 통해, 빵빵해져 버린 내 자아에 구멍을 내줘야 한다. 너무 가까워져 버린 나 자신으로부터 약간의 틈을 만들어야 한다.
동작을 빛나게 하는 건 멈춤이다. 일을 빛나게 하는 건 휴식이며, 사람을 빛나게 하는 건 결함이다. 이 사실을 잊을 때마다 여기로 돌아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