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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규 Oct 20. 2024

빈말 알레르기

아무도 믿지 않는 아무말

나이를 먹을 수록 심해지는 알레르기 반응이 하나 있다.

빈말 알레르기 말이다.


이 질병은 온 사회에 만연해 있다. 자기소개서를 써본 누구라도 안다. 적당한 직장을 얻고 싶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포부라느니, 꿈이라느니 하는 말로 포장해가며 내 서류를 검토할 미상의 누군가에게 알랑거리자면 창작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된다.


인간 사회는 '그럴듯한 문구'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조 이름 따위를 정하는 데도 그럴듯한 뜻풀이를 기대한다. 할 말이 없어도 건배사를 강요당한다. 모든 국기의 색깔과 문양은 저마다 정의, 평화, 독립 따위의 미사어구가 붙어 있다. 사랑, 정의, 봉사라는 단어를 새긴 학교 정문의 돌덩어리라던가, 고객사랑을 강조하는 고객상담실의 현수막 같은 것들이 진심으로 마음에 와닿았던 적이 있는가? 정치인의 연설, 기업 광고는 이제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 소음이 된 지 오래다.


진정으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는, 교장선생님의 공허한 훈화말씀 같은 말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나조차도 스스로를 포장하려는 욕구로 똘똘 뭉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빈말 알레르기로 재채기를 하다 상복부에 알이 배기고 마는 매캐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할 말이 없으면 할 말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세상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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