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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규 Nov 30. 2024

인간은 추상적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실용주의 멘탈 모델 '예시론'

 제목은 어떤 책을 읽던 중 스쳐 지나갔던 문장이었는데, 이후에 곱씹을수록 영양가가 우러나오는 것으로 밝혀진 명문이다. 애석하게도 책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어떤 문장을 만났을 때 예시가 떠오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 문장을 읽고 당신의 머릿속에는 '예시를 듣고 나서야 어떤 문장이 이해가 갔던 경험'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느낌'까지는 기억이 나고, 막상 하나도 꼽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이런 '예시'가 인지활동의 근간이라고 믿게 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고, 실제로 작동 예시(worked example)는 인지부하 이론에서 학습에 있어 최고로 쳐주는 방법인 것을 보면 꽤 유효한 멘탈 모델인 것 같다. 나는 '예시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선, 예시는 이해를 돕는다. 따라서 나는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거든 예시를 하나 이상 들려고 노력하고, 반대로 상대방의 말이 잘 이해가 안 가면 예시를 하나 들어달라고 한다. 물론 회사 동료라던가, 전문가 간의 대화 또는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제처럼 맥락을 공유하는 대화에서는 구태여 구구절절한 예시를 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화에 지장을 줄 정도로 예시를 충분히 들지 못하는(않는) 사람은 아래 몇 가지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지적 허영을 부리는 경우다. 인간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경외롭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예시를 들게 되면 상대방이 나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알고 보니 별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취한 사람들은 추상적인 말을 좋아한다. 아니면 별거 아닌 일을 뜬구름 잡듯 부풀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자아감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해 스스로를 부풀려 포장하는 케이스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사기꾼이다. 추상적인 언어는 전문가 집단에서 많이 사용하는데, 높은 전문성은 많은 세부사항을 포함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언어의 사용이 잦을 수밖에 없다. 사기꾼들은 세부사항에 대해 전혀 모름에도 전문가 집단의 언어만을 모방하여 전문가 행세를 한다.


 세 번째는 지식의 저주다. 내가 알고 있는 예시를 상대방도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 경우는 딱히 악의가 없고, 상대방 수준에 따라 적절한 언어의 추상 수준을 정하지 못한 것뿐이다. 지식의 저주에 걸리지 않고 상대방의 수준에 따라 적절한 예시를 들고 추상 수준을 정하는 것은 고급 기술이다. 실제로 이런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 강의로 큰돈을 번다. 교육계 일타강사들이 그 예시다.


 네 번째는 예시를 잊어버리고 추상적인 문장만 기억나는 경우다. 웃길 수 있지만 이런 경우가 의외로 많다. 어떤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는데, 사건은 까먹고 교훈만 기억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사람 본성은 변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막상 내 기억 속에 예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질문 중 하나가 "예시를 들어주세요"다. 이 질문을 통해 내가 말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경험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공감할 수 있고, 상대방이 예시를 하나밖에 들지 못한다면 성급한 일반화를 한 건 아닌지 알 수도 있다.

 


 다음으로, 예시는 책을 고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나는 언젠가부터 책을 고를 때 이 책이 '내 삶에 실용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보기 시작했다. 인간은 결국 구체적인 물리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아무리 준엄하고 그럴듯한 이념도 결국 현실 속의 실천 가능한 행동으로 내려왔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념이 그럴듯한 철학 사상을 기반으로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 수천만 명을 희생시킨 비극의 씨앗이 됐듯이, 모든 명제는 그 예시로써 실용성이 증명돼야만 가치가 있다(물론 훌륭한 철학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실용적이다).


 나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쓰고 싶기 때문에 가급적 예시를 들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만 하면 글의 맛이 부족해지는 것도 맞다. 실제로 흩어진 사례들을 묶어 어떤 개념을 만드는 것도 사고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 간극을 넘어서기 위해 적절한 예시로 읽기 쉽게 쓰인 한편 반짝이는 통찰이 담긴 글의 균형을 탐색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밖에도 예시론은 여기저기 쓸모가 많다.

-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연구할 때 구체적인 예시를 들고 시작하면 훨씬 진도가 빠르다.

- 책을 읽다 이해가 안 가면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작가가 예시를 안 들어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 내가 일반화하고 싶은 명제가 있을 때, 예시를 최소 세 개 이상 들어보면 지적으로 정직해질 수 있다.

- 대화 중에 표현이 어려우면 예시를 던지고 '어떤 느낌인지 알지?'라고 해도 상대방이 잘 이해한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서도 예시론을 통해 도움을 얻는 예시가 생긴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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