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에 있는 지금 돌아보는, 콩밭에 가 있던 마음에 대해
이 글은 지난 글에서 이어진다.
고난과 역경을 겪었던 첫 배 이후로는 업무적으로 적응도 잘하고, 무난한 승선 생활을 했다. 진급도 제때 하고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며 심신 건강하게 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실 다른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이야기는 별 재미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길게 쓰지 않으려고 한다. 시도 때도 없는 회식과 포커처럼 괴로웠던 일들을 줄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별로 영양가가 없을 것 같아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무렵에 내가 고민이 깊어졌던 것은 전문성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항해사로서의 전문성은 흥미가 없었다. 일단 뱃멀미를 꽤 심하게 했기 때문에(...) 24시간 기우뚱거리는 쇳덩어리 속에서 글자를 읽을라 치면 토를 할 것 같았다. 물론 내 업무를 쳐낼 정도는 공부를 했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정박 작업을 이미지 트레이닝 하다가 배를 정박시키는 꿈까지 꿀 정도였다. 다만 평생 내 직업으로서의 전문성까지는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전문성이란 무엇일까? 나는 전문성은 '어떤 주제에 관해 잘 짜인 뇌세포 구조물'이라고 매우 구체적인 정의를 내렸다. 인지 과학 분야에서는 이를 심적 표상(mind representation)이라고 하는데, 얼마 안 되는 인간의 작업 기억을 보조하기 위한 장기기억 속의 구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면 꼬리를 흔드는 복슬복슬한 생명체가 떠오르는데, 이런 이미지가 강아지라는 개념에 대한 심적 표상이다. 전문성이라고 하면, 내 업무 분야에 대해 내가 가진 뇌세포 구조물을 뜻한다. 이 구조물이 크고 섬세할수록 어떤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고, 일반인은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다. 바둑 기사들이 첫 수부터 마지막 수까지 모두 외워서 복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바둑이라는 패턴에 대한 거대한 뇌세포 구조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내 머릿속에 이런 멋있는 구조물을 만들고 싶었다.
무언가 한 가지 주제를 깊게 파고 들어가다 보면 점점 관련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줄어들고, 마침내는 주변에 거의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이 경우 그 주제에 대해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선박에서 쓰이는 원심펌프, 정확히는 삼상유도전동기가 왜 고정된 회전수(RPM)를 가지는지가 하는 주제가 궁금했다. 사실 직무적으로 꼭 알아야 할 것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전병칠 강사님의 전기 강의도 들어보고, 혼자 앉아서 오랫동안 고민도 해보았다. 그래서 결국은 관련 주제에 관해 내 머릿속에 구조물이 생겼다.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읽지 않아도 된다).
"전압이 인가되면 회전축을 회전시키는 삼상유도전동기는, 회전축이 돌아가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회전수가 올라갈수록 반대 방향으로 전기를 밀어내는 역기전력이 발생하고, 이 역기전력이 회전축을 돌리려는 기전력과 평형을 이루는 지점까지만 RPM이 올라가게 된다. 원심펌프 토출변 밸브가 열리는 경우, 펌프 케이징 속에 운동에너지를 축적한 유체가 토출 되고,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유체가 유입되면서 임펠라에 부딪혀 회전축의 속도를 늦추고, 이는 역기전력을 감소시켜 더 많은 전류가 흐르게 하며, 회전축의 속도를 복구시킨다."
알아서 나쁠 지식은 별로 없지만, 사실 위 지식이 그렇게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 기관부에서도(심지어 기관장님까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굳이 알아야 해?'라는 반응이었다. 어찌 됐건 나는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깊이 있게 알아가는 즐거움을 종종 느꼈는데, 전문성이 내게 선물하는 일종의 능력들이 꽤 신기했기 때문이다. 또, 누구나 시간을 들이면 얼마든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만의 깊은 영역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나는 선상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해 틈만 나면 엑셀이나 파이썬으로 각종 툴을 만들곤 했다. 1시간씩 걸리던 지루한 업무를 10분 만에 끝내게 해 준다던가, 출항 후 선원들이 볼 유튜브 동영상을 하룻밤 새 수 백 편씩 다운로드한다던가 하는 소소한 프로그램들이었다. 이런 툴을 만드는 일은 너무나 즐거워 시간도 잘 가고 멀미조차 잊게 만드는 취미가 되었다. 한편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분야를 잘 알고 싶어 졌는데, 이 끝이 안 보이는 복잡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만든 결과물로 인해 삶이 편리해지는 경험을 한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퇴사 후 잠시 새우양식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끝내는 개발자가 된 지금에 와서 보면 사람이 결국 따라가게 되는 본인만의 '결'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됐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항해사로서의 경험들은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 과거의 점(dot)이 되어, 언젠가 다른 삶의 경험과 이어질 수 있는 지점으로 남아있다. 로봇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된 지금도 항해사 시절의 경험들이 꽤나 도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앞으로 내 커리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해도,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사는 요즘에 나름 다채로운 삶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편에는 내 항해사 경력과 개발자 경력 사이에 뜬금없이 들어차 있는 새우양식에 뛰어든 이야기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