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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규 Dec 22. 2024

행복에 대한 흔한 착각

나는 어린 시절부터 꽤 오랜 시간 내 안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관찰하고 실험해 왔다. 외부의 사건들, 나의 사고방식, 여러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과 조언들을 내 두개골에서 지지고 볶은 결과 몇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주요 요지는, 사실 우리가 행복을 좇는 과정에 몇 가지 착각과 환상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깨지 못하면 자칫 평생 불행 속에 갇혀살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힘든 일이 있는데 마음이 멀쩡하다면 그건 더 큰 문제다. 당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듣는 것만으로 마음을 얻는다>라는 책에서 본 구절인데, 불행이라는 요소는 한편으로 인간으로서의 감정 메커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위로를 준다. 우리가 뉴스에서 온갖 진상들을 보며 '왜 저렇게 살까'라고 생각을 하지 않나. 이 진상들은 사회적 감정 회로가 훼손되어 남에게 민폐를 끼쳐도 마음이 힘들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사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대가를 치른다. 괴로움은 생존을 위해 피해 가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 감각이고, 이를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부터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다.



둘째,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복제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진 단백질 기계이고, 감정은 복제라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행동을 유도하는 호르몬의 명령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존재는 일절 중요하거나 숭고하거나 소중하거나 뜻깊지 않으며, 이 생을 행복하게 보내다가 가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말이 너무 심했나?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어쨌든 내 삶이 행복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그 편이 역설적으로 더 행복하다.



셋째, 막상 이루고 나면 별 재미없다. 오히려 그 과정이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에 푹 빠진 적이 있었는데, 게임 내에서 가장 큰 '상업용 대형 클리퍼'라는 배를 타기 위해 밤낮을 열심히 노력했었다. 돛도 많이 달려서 빠르고, 짐도 많이 실을 수 있는 최고의 배였다. 그리고 무려 8개월 만에 나의 심장을 뛰게 한 그 배를 타게 됐는데, 나는 아직도 그 허무함을 잊을 수 없다. 그 게임에서 더 이상 바라고 기대하는 게 없어지자, 정말로,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실제로 도파민 호르몬은 무언가를 기대할 때 가장 많이 나오고, 보상을 받은 후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링크).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성취의 허무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본인은 못 느껴봤다면 구글 검색창에 '막상 이루고 나니 허무했다'라고 검색해 보자. 허무함에 대한 간증들이 넘쳐난다. 큰돈을 벌고 싶다는 꿈도, 이루고 나면 똑같이 허무할 것이다. 마약에 손을 대는 재벌 3세를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 돈과 쾌락이 목적인 삶은, 이루지 못해 불행하거나 쉽게 허무해진다.


요컨대 결과에 목을 매면 안 된다.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향상심과 자기 효능감으로 삶을 채우는 게 낫다.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몰입이 주는 즐거움은 행복에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하다. 유명인들 중에 돈 많이 벌었다고 본업을 그만두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배우 원빈 빼고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축구선수 메시와 호날두는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매일 힘든 훈련을 받으며 아직 축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대기업을 은퇴하고 몸이 근질거려 경비원으로 취직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아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이 상황은, 오히려 좋다.



넷째, 적극적인 비교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의 비결이라며 남과의 비교를 멈추라고 하는 마당에 이게 무슨 소리냐? 과거와 비교를 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비교를 통해 쉽게 불행해지지만 그만큼 비교를 통해 쉽게 행복해진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라는 책에 따르면, 오늘날 평균적인 지구인이 소비하는 에너지는 2,500와트인데, 이를 환산하면 150명의 노예가 생산하는 에너지와 같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속하니까 한국인은 과거로 치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300명의 노예를 거느린 귀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꼭 한 번 읽어보자.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숨 쉴 새도 없이 계속 떠들어준다.)


나는 매일 수도꼭지를 열면 나오는 따뜻하고 깨끗한 물,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 매일 먹는 고기반찬에 감사하며 산다. 나는 하남자처럼 인스타그램을 훔쳐보며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매일 과감히 이집트 노예가 됐다가, 중세 봉건제의 농노가 됐다가, 돌도끼로 부족 전쟁을 하던 구석기시대를 다녀온다. 이렇게 하면 현실로 복귀했을 때 내가 누리는 이 삶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대접해 주는 세상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아아, 이런 미천한 나에게 흰쌀밥과 고기반찬이 매일 주어지다니!



만약 내가 말한 사항들을 모두 적용해 봐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실제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불행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래도 괜찮은 이유가 있다. 어차피 행복은 불행이라는 땅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초코파이도 북한이나 군대에서 먹어야 맛있듯이, 불행을 겪어봐야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당신의 삶이 불행하다면, 언젠가 더 행복해질 잠재력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비옥한 거름 밑에서 당신의 행복도 언젠가 예쁘게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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