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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비라이온 Nov 13. 2021

겐지의 인물묘사에 나타나는 긍정-부정의 대비와 그 의미

겐지모노가타리 모미지노가(紅葉賀)권 비평문

「源氏物語図〈若菜・紅葉賀〉(左隻)狩野養信筆」, 江戸時代, 法然寺蔵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주인공 히카루겐지(光源氏)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기량을 가진 인물이다. 특히 겐지가 영화의 절정으로 다가가는 과정에 해당하는 초반의 권(巻)에서는 그의 모든 모습과 행위에 대해 빛나고 뛰어나며 감탄을 자아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모미지노가(紅葉賀)에서는 겐지의 외관과 행위에 대한 묘사에서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묘사한 직후에 불길함과 두려움이라는 부정적 표현이 이어지는 패턴이 나타나고 있어 다른 권과 구별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특히 스자쿠인(朱雀院)의 행행(幸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후지츠보(藤壺)가 안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겐지가 청해파(青海波)를 추는 모습, 행행 당일 단풍 속에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부정적 표현은 겐지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동궁(東宮)의 어머니 고키덴노뇨고(弘徽殿女御)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겐지의 춤사위를 두고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볼 거리입니다. 노래를 부르시는 목소리는 이야말로 부처님 나라의 가릉빈가처럼 들립니다.’라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자리에 있던 천황과 당상관, 친왕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표현이 나온 직후, 고키덴노뇨고는 ‘신조차 하늘에서 보고 홀릴 듯한 자태가 아닌가. 이것 참, 불길하구나’라고 말하여, 주변 궁녀들이 이를 ‘한심한 말씀’이라고 여겼다는 서술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그녀가 우대신의 딸로, 좌대신의 사위이자 다른 후궁의 아들인 겐지의 정적이라는 점에서 질투나 질시로 인해 뱉은 언사로 해석할 수 있지만, ‘신조차 홀릴 만한 자태(긍정) ▶ 불길함(부정)’으로 귀결되는 패턴의 문장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행행 당일의 이야기 첫 부분에서는 미카도(帝)의 생각을 빌어 유사한 서술이 나타난다. ‘일전에 겐지의 석양에 빛나던 모습을 본(긍정) ▶ 미카도(帝)는 왠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을(부정) 느끼고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독경 같은 것들을 하도록…’이라는 구절이다. 실제 공연 모습에 대한 찬사 직후에도 부정적 표현이 나타난다. 이는 고키덴노뇨고와 같이 정적의 입장을 가진 인물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작품의 화자가 서술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입장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며, ‘각양각색으로 흩날리는 나뭇잎들 속에서 겐지가 추시는 청해파가 빛나는 듯한 모양은(긍정)  참으로 왠지 모르게 두렵기(부정)까지 할 정도입니다.’와 같은 형태로 앞에서 말한 ‘긍정  부정’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伝土佐光則 屏風貼付源氏物語図色紙 紅葉賀7巻 - 青海波를 추는 겐지(源氏)와 도노츄조(頭中将)


 뒤이어 ‘겐지가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국화의 색색으로 변해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꽃을 카자시로 삼아, 오늘은 또 다시 없을 온갖 수단을 다한 그 이리아야(入り綾 : 춤을 맺는 동작)의 묘미(긍정)는  오싹하는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부정)이니,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에서도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언급한 직후에 완전히 상반되는 ‘오싹하는 한기마저 느껴진다’는 다소 섬뜩한 표현이 이어져, 이같은 연회의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패턴은 겐지가 아버지 기리쓰보(桐壺)천황과 함께, 후지쓰보(藤壺)가 낳은 황자를 첫 대면하는 장면에서 황자에 대한 묘사로부터 다시 한번 나타난다. ‘와카미야(若宮)가 무언가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짓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울 정도로 귀여웠습니다.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화자가 이 의 초반부터 겐지의 아름답고 뛰어난 모습에 대해 불길함과 두려움의 표현을 병치시켜 온 이유가 여기서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긍정  부정’의 패턴은 모미지노가 권의 내용에서 주된 부분을 차지하는 죄책감과 불안감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일종의 장치로 볼 수 있다. 즉, 독자가 이야기 속에 묘사된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에만 도취되지 않고, 후지쓰보가 잉태한 겐지와의 밀통의 씨앗에 대한 두 사람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만들어, 주인공의 현재 심리상태와 유사한 불편함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장치인 것이다. 태어난 황자를 처음 보는 장면에서 유사한 패턴의 ‘무섭도록 귀엽다’는 표현이 사용됨으로써, 이전까지의 불편한 감정을 상기시킨 원인이 바로 이 황자에게 있다는 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칭송하는 단어들 사이에 마치 찬물을 끼얹듯 불길함과 두려움의 표현을 섞어 ‘긍정  부정’의 패턴을 반복함으로써, 작자는 모미지노가 권의 내용과 구조를 암시하고, 등장인물의 심리상태에 독자가 공명하여 긴박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서는, 겐지모노가타리 2부에서 겐지의 영화가 절정에 이른 직후 온나산노미야(女三宮)의 밀통으로 가오루(薫)가 태어나게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목의 ‘긍정  부정’의 패턴은 모미지노가 권 뿐 아니라 겐지모노가타리 전체, 히카루겐지의 인생 전체의 흐름과 구조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단순한 플롯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인물의 입장과 감정이 다채롭게 전개되면서 극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암시와 공감 유도 장치들이 나타나는 점은, 천년 전 쓰여진 겐지모노가타리가 탁월한 고전일 뿐 아니라 세계최초로 심리묘사를 동반한 근대소설 다운 특징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終



** 대학원 일본문학세미나 과제 - 모미지노가마키에 대한 2000자 이내의 비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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