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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비라이온 Nov 16. 2021

겐지모노가타리 속 가시와기(柏木)의 등장 의미와 역할

겐지모노가타리 가시와기(柏木)권 비평문

- 히카루 겐지의 ‘거울적 자아’, 성찰 계기 제공자로서 가시와기(柏木)의 의미를 중심으로


    흔히 가시와기(柏木)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2부의 주인공으로 일컬어진다. 가시와기가 등장한 시점부터 스토리 전개와 심리묘사의 중심이 가시와기 쪽으로 크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가시와기는 히카루겐지(光源氏)의 어린 아내 온나산노미야(女三宮)와의 밀통을 행한 주범으로서, 확실히 겐지모노가타리의 소위 하강 국면을 주도하는 비련의 인물이긴 하지만, 명백히 히카루겐지라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일을 당한 겐지의 심리에 보다 초점을 두어 전개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가시와기가 온나산노미야에게 관심을 갖게 된, 사실 알고 보면 너무나 공허하고 덧없는 계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가 밀통을 결행하는 과정에서의 심리, 연회에서 사실을 알고 있는 겐지의 눈과 마주친 이후 발병하여 병석에서 홀로 생각하거나 혹은 유기리(夕霧)와 만나 털어놓는 이야기들, 온나산노미야와의 마지막 증답(贈答)상황들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마치 주인공이 뒤바뀐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므로 가시와기라는 인물이 겐지모노가타리의 서사에서 대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작가의 집필의도 및 전반적인 주제의식에 접근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사료된다.


源氏物語絵巻、柏木 - 病床にある柏木と夕霧との対面 (徳川博物館、名古屋)


    가시와기는 지난 날 겐지의 라이벌이자 처남으로 역시 고귀한 태생인 도노츄조(頭中将、가시와기 권에서는 大臣, 태정대신)의 아들로서, 그 역시 고귀한 신분의 귀공자다. 그리고 아버지 뻘인 최고 권력자의 정처(正妻)에 해당하는 매우 고귀한 여성과 밀통을 결행한다는 점에서 히카루겐지와 공통점을 갖는 인물이다. 또한, 두 사람이 밀통을 결행하게 되는 계기가 매우 추상적이고 스스로 사로잡힌 강박에 기인한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먼저, 겐지는 일생을 두고 ‘어머니와 닮은 여성’에 집착하는데, 이는 어머니를 일찍 잃은 트라우마,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겐지는 후지쓰보(藤壺)라는 인물 개인의 매력이나 특성도 있겠으나, 그녀가 어머니와 매우 닮았다는 시녀의 말에 처음으로 강한 인상을 받아, 나이가 차도록 이를 잊지 못하여 결국 밀통을 결행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시와기는 ‘높은 곳으로의 지향’에 사로잡힌 인물로서,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뜻을 가지고, 무슨 일에 있어서나 남보다 한 단계 앞서려고, 공사에 있어서 남다르게 높은 뜻을 갖고 있었지만…(p. 3)’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에서 그가 갖고 있었던 일종의 공명심 혹은 높은 곳(사람)을 동경하는 향상심이 드러난다. 그런데 황녀인 온나산노미야에게 구애를 하다 현재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좌절됨에 따라, 여기서 온 자격지심이나 좌절감이 카이마미(垣間見)**를 통해 살짝 엿본 온나산노미야의 모습에 과도한 관심과 집착을 갖게 되면서, 그가 파멸의 사랑에 몸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 요컨대, 겐지와 가시와기는 둘 다 상대 여성 자체에 직접적인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본인들이 추구하며 집착하던 어떤 가치에 의해 자극 받고 강박에 사로잡혀 불의의 사랑을 결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또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밀통의 계기가 스스로의 심리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 혹은 아버지 뻘 되는 최고 권력자의 정처와 밀통을 저지른다는 점이 공통되긴 하지만, 이후 전개는 판이하게 다르다. 모미지노가(紅葉賀)권의 청해파(青海波)를 추는 장면과 후지쓰보가 출산한 황자(훗날의 冷泉帝)를 기리츠보(桐壺) 천황이 안고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겐지와 후지쓰보의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자세히 살펴보면, 후지쓰보는 밀통의 행위와 출산한 황자의 존재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죄책감과 불안감을 갖고 있는 데 비해, 겐지는 아버지 기리츠보 천황이 ‘뛰어난 자들은 닮는 법’이라며 황자가 겐지와 닮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얼굴색이 변하긴 하나, 오히려 후지쓰보를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처지에 대해 비관한다든가, 증답을 하면서 후지쓰보의 황후다운 식견에 감탄하는 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자체에 보다 주목하는 모양새다. 이는 천황의 총애를 받는 자로서 자만심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이고, 한편으론 십대인 당시 그의 나이에서도 기인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가시와기의 경우, 온나산노미야에게 ‘아와레(あはれ)***’를 갈구하며 증답을 하는 등의 모습은, 밀통을 저지른 후에도 후지쓰보의 사가(私家)를 찾거나 증답을 시도하며 불의의 사랑에 집착하는 겐지의 모습과 겹쳐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와, 이를 겐지가 알았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를 탓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은 크게 다르다고 하겠다. 특히 그러한 심리는 ‘나 이외에 누구를 원망할 것인지, 모두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잘못되어 버린 것 같다(p. 3)’, ‘그것보다는 괘씸한 자라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주변에서도, 아무리 그래도 용서해 주실 것이다(p. 4)’, ‘모든 일은 임종할 때에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 이외의 과실은 없으니까,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일이 있을 때에 언제나 곁에 가까이 두어 주셨던 분(겐지)의 연민도 생길 것이다(p. 4)’ 등의 대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처럼, 가시와기는 겐지모노가타리에 속에서 겐지가 충분히 겪지 않고 지나갔던 후회나 죄책감, 불안감 등의 감정을 대리하여 겪어내며,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부각하는 히카루겐지의 ‘거울적 자아’로 기능하고 있다. 가시와기의 차분하고 어찌보면 소심하기까지 한 그 성격은, 천황의 총애와 본인의 외모 및 기량에 대한 자신감으로 거침없이 살아온 겐지의 대척점과 같은 모습으로서, 한편으론 거울에 비추면 모든 것이 반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겐지의 내면적 자아 혹은 성찰적 자아로 보인다. 특히, 온나산노미야의 출산 장면에서 겐지가 ‘공교롭게도 가시와기(柏木)를 쏙 빼닮은 얼굴로 태어난다면 곤란하겠지(p. 14)’, ‘내가 언제나 두렵다고 생각해 온 일의 응보인 것 같다. 이승에서 이처럼 생각지도 않는 응보를 만났으니 후세에서의 죄도 조금은 가벼워지겠지(p. 14)’라고 생각하는 대목에서 직접적으로 ‘응보(報い)’라는 단어를 언급함으로써, 가시와기의 이야기는 겐지로 하여금 바로 이 단어를 언급하고 떠올리게 하기 위한 장치임이 명확해진다. 심지어 겐지는 아버지 기리츠보 천황도 자신과 같이 진실을 알았던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마저 갖는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지난 날 자신과 같은 귀공자인 가시와기로 인해 동일한 사건이 겐지 자신에게도 발생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가시와기는 겐지모노가타리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인과응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과거 겐지가 젊은 시절 밀통을 저지른 당시 다소 가볍게 지나쳐 버린 성찰과 고통, 후회의 과정을, 미뤄둔 성장통을 뒤늦게 겪듯 다시 돌려주는 장치로서 기능하는 인물이다. 일생을 한 바퀴 돌아 노년에 다가가는 겐지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겐지의 ‘거울적 자아’로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 무리한 시도는 아닐 것이다. 평생을 두고 빛나는 인물로서 절정의 영화를 누리는 히카루겐지이지만, 결국 저지른 죄는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인생이든 결국 덧없는 것이라는 주제 의식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장치로서 가시와기라는 인물은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하겠다. 終





* 증답(ぞうとう、贈答) : 서로 和歌를 주고받는 행위

** 카이마미(かいまみ、垣間見) :  틈 사이로 슬쩍 엿봄. 

     고대에는 여성들이 발이나 휘장, 격자 등으로 철저히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에, 남성의 연모는 직접적인 

     모습이 아닌 다른 풍취나 소문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이 어떤 계기로 여성에게 관심을 갖게 

     된 뒤 그림자라도 엿보기 위해 담이나 격자 너머를 엿보는 행위를 가리킨다.

*** 아와레(あはれ) : 깊고 서글픈 감동과 정취를 말한다. 헤이안시대 문학의 기본적인 미적 이념. 

     후에 일본문학 美의 근간으로 발전하여, 조화미(調和美)·우아미(優雅美)·정숙미(静寂美)·비애미

      (悲哀美) 등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 (=> もののあはれ、をかし)





** 대학원 일본문학세미나 과제 - 가시와기마키에 대한 2000자 이상의 비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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