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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P Aug 26. 2022

1. 취업 기회를 코 앞에 두고 일어난 일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장래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 TV 프로그램을 즐겨 봤었고, 방송을 만드는 일에 호기심을 가졌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 이제 구체적으로 나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가장 먼저 갈림길에 서게 되는 건 단연 문과와 이과의 선택. 여기서 나는 자연스레 문과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방송작가가 된 나의 미래를 꿈꾸며 말이다. 


대학을 가면 더욱 그 진로에 따라 구체적인 길을 결정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진로는 단 하나였다. 여러 가지 꿈을 꾸며 고민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나는 확고했다. 그래서 대학교 그리고 학과를 지원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방법을 익혀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문예창작학과 선택이 나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간다고 해서 무조건 취업이 되는 건 아니다. 특히나 나는 지방에 거주를 하며 대학교도 지방에 위치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더욱이 상경을 위한 루트를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했다. 현실적으로 내가 보고 흥미를 느낀 TV 프로그램에 내가 작가로서 참가를 하기 위해서는 방송국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을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를 3학년까지 다닌 후 휴학을 결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방송국 취업을 위해 아카데미를 수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서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루트였다. 이곳에서 방송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실무적인 경험도 해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역시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갈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면접을 봐야 했다. 다행히 나는 면접에 통과를 했고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아카데미 수업을 들어갔을 때 나는 굉장히 어린 편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22살이었다. 덕분에 같은 기수 언니, 오빠들의 챙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우리는 모두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함께 으쌰 으쌰 하며 같은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을 했다.  


당시 수업을 들어오던 강사들의 수업에 집중을 하기 위해 수업 시간 한참 전에 출석을 해서 맨 앞자리를 사수했다. 서울에서 내가 거주했던 곳은 아카데미와 매우 가까운 거리였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그만큼 나의 의지는 굉장했다. 뭔가 내가 꿈만 꾸던 일과 한 걸음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더욱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고 할까? 마치 게임에서 퀘스트를 하나씩 깨 나가는 것 같은 흥미로 가득했다. 결승전이 코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울살이의 기대감은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22살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사실 수중에 가진 돈이 거의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부터 상경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를 다니며 알바를 틈틈이 하며 나름대로의 자금을 모아 왔다. 그렇게 모은 돈은 단 몇 백만 원. 현실적으로 집다운 집을 구하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아카데미 근처의 고시텔을 계약했고, 본 집 화장실만 한 공간에서 서울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꿈과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에 그저 설레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막내 작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당시 아카데미를 통해서 구인구직이 많이 이뤄졌었는데, 첫 TO 소식은 나를 비롯해 동기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을 해보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고 또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초심자의 행운이 어느 정도 따라주지는 않을까 살짝 기대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케이블, 종편 채널이 활성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파의 위상이 굉장했던 시절이었는데, 하필 TO가 난 프로그램이 또 공중파 프로그램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때 작가 지망생들에게 돌았던 이야기는 '한 번 공중파를 들어가면 무조건 공중파에서 돌고, 한 번 케이블을 가면 평생 케이블을 돈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케이블의 영향력이 매우 커져서 오히려 공중파를 가는 게 역량을 펼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케이블 프로그램에 자리가 나도 공중파를 가기 위해 꺼리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될걸 알지만 일말의 기대를 하면서 자소서를 준비했다. 


그렇게 자소서 제출 당일이 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을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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