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작가님의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고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김민철 작가님의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나오는 구절 중 하나이다. 이런 물음에 심장 어딘가가 간질 해지고, 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고 말한다. 개인마다 다른 이유로 여행의 의미가 빛날 수 있다는 것.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것을 못 견디는지 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만큼은 행복해야 했다.
나는 28년(지금은 29세) 내 인생 최초로 제주도에서 혼자 한 달을 살아봤었다. 1년 동안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던 직장 상사와 직원들 생각 안 하는 사장. 이들이 있는 공간은 사회 초년생인 나에겐 너무 벅찼다. 더군다나 본가인 안산에서 교대역까지 매일 왕복 2시간 이상을 버스에서 보냈던 피곤함과 함께 공황장애, 소화장애까지 겪었다. 몸이 아프니 서울 그 자체가 싫어졌다. 차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로, 정장을 입은 사람들만 봐도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냥 팍팍한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치 아무 맛 안나는 퍽퍽한 닭가슴살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그런 느낌. 닭가슴살을 먹다가 목 막혀 죽겠는데 물은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그 답답함.
그래서 입사한 지 1년 뒤 바로 퇴사를 하고 제주도로 떠났다. 그냥 한 달 간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에서 혼자 자연을 만끽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풀과 나무가 무성한 풍경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있고 싶었다. 그저 내 안에 있던 무거운 짐들을 다 풀어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냥 여유로움을 갖는 게 내 소원이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도착한 당일 나도 모르게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유명한 명소, 먹거리 등 제주도에 오면 꼭 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나 자신의 마음을 꽉 조였다. 난 마음의 짐을 모두 벗어던지려고 제주도에 왔는데 마치 숙제처럼 속전속결로 제주도의 모든 것들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 당시 제주도에 온 지 4일째였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외로움도 너무 컸다.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도 작가가 프랑스 파리에 여행할 때 먹어야 할 것, 가봐야 할 것 등등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왔으니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고 말한다. 여행은 꼭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압박, 상대가 부러워하는 여행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 여행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안 행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행복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p.44
"왜 제주도까지 와서 바쁘게 살아?"
내 여행의 목적인 '여유로움'을 잡아준 건 한 달간 생활했던 1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말씀이었다.
줄곧 다른 손님과 다르게 부지런히 일어나고 아침을 챙겨 먹었던 나를 며칠간 유심히 지켜보시고 나서 왜 이리 바쁘게 사냐라고 물었다. 이곳이 육지보다 빠르게 어두워지고, 날씨도 변화무쌍한 특성상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제주도 명소를 둘러보느라 바빴을 뿐인데.. 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동안 했었던 여행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실감이 났다. 남아있는 기간만큼은 많이 둘러보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즐기자고 마음을 먹었다.
아침을 먹다가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환상숲에 가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인터넷에서 보지 못한 명소가 거기 있다고.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자연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환상숲은 해설 선생님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제주도만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산처럼 생겼지만 용암이 굳어져서 생긴 것이라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들도 생존 본능이 있는 것인지 서로 햇빛을 보려고 서로 뒤엉킨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가시덤불도 있어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잘 드나들 수 있도록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흙을 덮어 지금의 환상숲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때 생긴 지 얼마 안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작년 일이라 자세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환상숲을 용암이 덮인 지역이라고 해서 '곶자왈'이라고 불렀었던 것 같다.)
해설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환상숲을 천천히 걸으면서 나뭇가지들이 뒤엉킨 나무들, 바위 같지만 딱딱하게 굳어진 용암은 물론 심지어 반쯤 갈라져버린 나무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관찰했다. 마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는 듯 이곳은 제주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었고, 제주에서 힘들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숨길이 담겨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환상숲의 매력을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아직 물 러기지 않은 어둠과 이제 막 당도한 빛이 어우러지는 풍경 앞에서 나는 어느 순간 소리를 지르는 것도 멈췄다. 그런 자연을 바라보며 경박하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이 자연 앞에서는 경건해야 했다. 경건하고 싶었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p.193
여행은 패스트푸드처럼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많은 곳을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가 있는 이곳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 그것이 여행의 참 맛이었다. 그러자 온몸에서 느끼고 있었던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듯했다.
이후 여행하면서 평소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배웠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났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서로의 고민을 말할 수 있었고, 별 것도 아닌데 웃고 떠들던 시간도 있었다. 제주도에 있는 시간 동안 처음보다 더 외로움을 덜 타게 됐고, 듣고 경험하는 즐거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제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행은 우리가 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새로운 인연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그 이야기가 내 존재 의미를 각인시켜줄 수 있다. 이러한 의미가 차곡차곡 쌓여 온전한 나 자신을 만들어간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이고,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