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결정적인 순간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포스터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는 '액자소설' 형태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인생을 바꾼 여행 스토리와 무채색 도시풍경이 무척 인상적이고 몽환적이었던 영화였다. 언젠가 리스본의 알파마 언덕에 올라 주인공이 지나가던 테주강과 4월 25일 다리*를 보고 싶었다.
* 1932년 총리로 임명된 살라자르가 국민을탄압하는 독재 체제를 36년간 지속하자 1974년 4월 25일 좌파 청년장교들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이를 지지하여 카네이션을 건네주었다는데서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불리며 다리 이름도 혁명일을 기념하여 지어졌다.
이 글은 최근 다녀온 6일간 여정 속에서 느낀 감회와 단편적인 지식으로 구성되었기에 부족한 면이 많아 보인다.그러나 뭔가 기억하고간직하고 싶은 갈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포르투 상 벤투역의 아줄레주(장식타일)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포르투갈인은 유럽 내에서 소득이 하위권에 머무나 '몰락한 양반처럼 예의범절을 지키려 하고 과묵한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지구상에서 가장 독실한 가톨릭 국가다. 어디서나 수많은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수도원도 많았던 나라다. 성모 발현지로 유명한 파티마(Fatima) 성지도 여기에 있다.
15세기 대항해 시절, 로마 가톨릭 전파에 가장 열심이었던 나라도 스페인이 아닌 포르투갈이었다. 인도를 시작으로 중국과 일본 등 동양의 포교에 앞장선 것도 이 나라 예수회였다고 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은 코임브라(Coimbra) 대학에서 공부하고, 브라가(Braga) 대성당에서 기도드리고, 포르투(Porto)에서 돈을 벌어서 리스본(Lisbon)에서 여생을 즐기는 거라고 하니 주요도시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포르투갈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무엇일까. <포르투갈은 블루다>를 쓴 조용준 작가는 "포르투갈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여행자는 블루(blue)의 그물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전 국토를 관통하는 색깔이 블루다. 블루는 귀하고 신성한 색이어서 성모 마리아의 옷도 대다수가 파란색이다."라고 하였다.
블루를 담고 있는 아줄레주(Azulejo)는 장식타일이다. 단순한 벽화나 눈요기용 데코레이션이 아니다. 역이든 박물관이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아줄레주는 포르투갈 국가의 탄생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 지난한 역사를 담고 있다. 예술작품이나 전통문양, 실생활에도 광범위하게 아줄레주로 표현되고 있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날은 가톨릭교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로 촛불을 켜두어서 해일과 함께 화재로인해 도심의 90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재건을 맡은 폼발후작은 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타일이 기능적, 위생적이고 열에 강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코발트블루의 아줄레주가포르투갈의 첫 인상으로손꼽고 싶다.
포르투 파두 공연장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노래는 파두(Fado)다. 파두는 사우다지(Saudade)를 기본으로 하는데, 우리 말로는 한(恨)과 비슷한 정서다. 창(唱)이나 타령처럼 구슬프고 애절한 음조로 바다로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고 슬퍼한다. 국민가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Barco Negro)>를 들으면 어느새 눈물이 흐른다. 고기잡이를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바닷가에 나가 기다리는데 저 수평선 너머 배가 보였다. 남편의 배. 그러나 그 배에는 검은 돛이 달려 남편의 죽음을 알린다.
침통하고 애간장이 미어지듯 슬픈 노래지만, 마지막 부분은 남편과의 사랑을 기억하며 희망과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포르투의 파두 공연장에서 기타 선율에 맞추어 남녀 가수의 노래를 가까이 들어보니, 내용은 모르지만 짙은 감성과 호소력 있는 음색으로 좌중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곁에서 토로하듯 자신의 희로애락을 애절히 노래하였다. 그런 점에서 TV조선의 <미스터트롯 2> 가수 송민준이 부른 <정녕>이란 노래가 파두에 어울리는 창법과 가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신은 나에게 할 말이 없나요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은데 당신의 눈에 한 방울 눈물이 이별의 진실인가요 사랑은 정녕 무엇인가요 가슴 하나 태우면 그만인가요 이별은 정녕 무엇인가요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인가요 돌아서는 그대 마지막 눈물에 나는 바람 되어 웁니다 (후략)
- 송민준 <정녕>
비 눔(Vinum)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포르투
여러 도시 중에 포르투가 가장 눈에 띄었다. '포르투갈' 이름은 포르투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되었다. 포르투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지만, 우리나라 경주처럼 역사와 문화, 전통이 살아있고 도루강을 배경으로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특히 동루이스 다리를 바라보며 노을 진 풍경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2018년 JTBC <비긴 어게인 2> 첫 버스킹 장소도 히베이라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포르투를 이틀간 구경하면서 이미 거쳤던 리스본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왜 이 도시가 인상적인지, 왜 한 달 살기를 희망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중세풍 도시 분위기와 청정한 날씨, 멋진 풍경, 저렴한 물가 수준,그리고 그 유명한 포트 와인 생산지가 아닌가! 시내는 여행객들로 붐볐지만, 마스크를 쓰거나 핸드폰을 보는 이들을 찾을 수가 없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전에 와 있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백년전쟁의 결과로 보르도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긴 영국에게 가장 큰 아픔은 보르도 와인을 마시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체지로 찾은 곳이 포르투 산지인데 영국까지 운송거리가 멀어 와인이 변질될 수 있었다. 그러자 고안된 것이 주정강화 와인으로, 12도의 알코올 도수를 가진 일반와인에 브랜디 원액을 첨가하여 18도 이상으로 높인 와인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알코올 도수는 올라갔지만 발효를 도중에 막았기 때문에 포도즙 본래의 과일향이 나는 단맛이 느껴진다. 조금씩 마시다 보면 술에 취해 앉은뱅이가 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얘기다. 나도 로제와인 한 병을 사서 집에서 홀짝 하고 싶은데 아직 마실 기회를 찾지 못했다.
포르투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 불리는 서점이 하나 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리바히아 렐루(Livaria Lello)인데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이 영감을 얻은 곳으로 더 유명해진 서점이다. 1층에서 2층으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니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떨어지는 빛이 책 진열대를 은은히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서점이 있다니! 작가에겐 글감을, 예술가에겐 영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렐리 서점의 내부 전경
그런가 하면, 포르투갈에는 스페인이나 이태리처럼 성당, 수도원, 궁전, 성곽 등이 주된 관광지이지만 자연 풍광도 훌륭했다. 대서양을 향해 있어서 아 기자기한 항구와 멋진 해변이 많았다. 특히 베나길(Benagil) 보트 투어는 인상적이었는데 바다와 면한 절벽아래 해식동굴들이 많았고, 그중에서 '천국으로 가는 문'이라는 베나길 동굴은 우리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햇살이 천장에 난 구멍으로 백사장을 밝히는데 마치 신세계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리듯 환상적이었다.
포르투갈 하면 먹거리를 놓칠 수 없겠다.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 근처 오래된 에그타르트 가게에서 원조 에그타르트를 먹어 보았다. 원래 수도사의 옷깃을 다리기 위해 계란 흰자를 사용하고 노른자는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노른자를 설탕과 배합하여 구워서 나온 게 지금의 에그타르트인데 금방 해서인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맛이 달랐다. 여긴 대서양과 접해서인지 생선류가 유명하며 빠깔라우(염장대구), 정어리구이, 문어요리가 알려져 있었다. 빠깔라우를 시식해 보았는데 살덩어리가 아니고 살을 잘게 발라 염장해서 야채와 함께 나왔는데 아쉽게도 입에 맞지 않아 남겼다. 처음이라 아직 적응이 안 된 거 같았다.
베나길 동굴 내부전경
한 나라를 일주일 둘러보고 얼마나 이해하고 알게 될까마는 첫인상도 중요하듯이 포르투갈은 볼수록 매력적이었다. 함께 간 아내는
"별 기대 없이 왔는데 편안하고 정감이 가네. 여기서 좀 살고 싶어요. 친구들과.."
화려함 대신 우아함이, 황금색 대신 무채색이, 사치스럼 대신 검소함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면서 하느님을 정성으로 믿는 국민들이 무슨 욕심과 물질을 추구하겠는가!
서울 대학로를 지나가다가 어느 식당에 걸린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 그렇다! 스치는 인연은 많지만 한걸음 더 스며들기가 어디 쉬운가. 애정이 싹트기까지 우리는 많은 노력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어느새 나는 포르투갈에 스며들고 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