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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brella Dec 29. 2021

Error code-3.  Dear. Vincent

 안녕하세요 빈센트.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처음 마음먹었을 때,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고민했어요. 작가님, 고흐 정도가 후보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편지에선 당신을 빈센트,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우연히 본 건 아니고, 이 편지를 위해서요.


 당신은 이미 죽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했어요. 혹 당신이 살아있었다고 해도 제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을까, 큰 의문이 들긴 하지만요. 그래도 전 당신을 아니까요. 아니 당신의 진짜를 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의 그림과 편지, 그리고 당신의 삶의 궤적을 통해 그나마 조금이라도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해'라는 조금 건방진 표현을 쓴 건, 제게 이해란 조금 남다른 의미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 중 한 분이 김애란 작가님인데요,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어쩌면 ”이해란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요. 전 이 문장을 읽고 소름이 돋았어요. 그리고 그때 이후로 내내 이해란 이런 의미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빈센트 당신을 알기 위해, 즉 이해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그림을 연구하고, 당신이 쓴 편지를 분석하고, 또 저 이전에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연구를 공부한다 해도, 제 생각은 빈센트 당신의 생각과 같아질 수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빈센트의 그림과 일상에서 공감을 하고, 당신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다 해도 전 당신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할 거예요. 그래서 전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의 우울은 겹쳐 있을지 몰라도, 빈센트와 저는 통렬하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이에요.


아참, 제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말했던가요? 그건 제가 당신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엄청난 극찬이었어죠. 다만, 당신이 염원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칭찬은 아니었어요. 근데 그래서 더 좋았어요. 제가 빈센트 당신을 닮았다고 말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모든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걸 표현해내는 모습"이 당신과 닮았다고요.


빈센트, 우리가 당신의 그림을 보고 위로받고 또 때로는 눈물 지을 수 있는 건 당신 역시 철저하게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거라 감히 말해봐요. 당신의 그림엔 다양하고 섬세한 감정들이 묻어 나와요.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저는 당신의 그림에서 열망과 허무, 따뜻함과 냉정함을 동시에 느껴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당신의 감각에 솔직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얻은 성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요. (이 편지를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요.) 제가 "모든 것에 반응하고 그걸 표현해내는 당신을 닮았다는 칭찬을 들었다는 말을 주변에 전할 때, 방금 설명은 조금 길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그냥 당신을 닮았다는 칭찬을 들었다고만 전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한 거예요. 마치 “그게 칭찬이야?”라는 의문으로 가득한 표정들이었어요.


당신의 죽음은 자살,이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죠. 물론 러빙 빈센트란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 바라던 대로 당신의 끝을 자살, 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래서 제가 당신을 닮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도 당신처럼 꽤나 우울한 사람이거든요.


우울증 치료를 받은 지는 4년이 되어가요. 횟수를 세어놓고 보니 오, 꽤나 오래됐네라는 생각에,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데요. 어쨌든, 저도 우울증 환자예요. 그리고 당신이 당신을 따뜻하고 마음이 깊은 사람이라고 기억되길 원했던 것처럼, 저도 제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저를 소개하는 모든 공간에 적어 놓은 한 문장이 있는데요. 그건, ‘제 모순된 마음을 결국 당신과 저의 삶과 숨을 보듬 어가는 동력으로 삼고 싶다.’라는 문장이에요. 그런데 사실 이 문장 앞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어요. 여기 있는 제 모순된 마음에 대한 설명이요. 원래 문장은 ‘죽음을 열망하면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이라는 단어들이 들어가 있었어요.


중요한 이 단어들을 생략한 이유는 세상은 여전히, 죽음을 열망하고 바라는 사람을 거부하고 부정하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여긴, ‘죽고 싶다,’라는 말을 쉽게 내뱉으면서도 그 말이 진정 ‘죽고 싶은 열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그런 모순적인 세상이에요. 이상하고 애석하죠. 어차피 사람들은 다 죽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잘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죽어가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람들은 유독 ‘죽음’이라는 단어에 민감해요. 물론 몇몇이 거론하는 죽음은 조금 먹먹하고 끈적할지 몰라요. 하지만 그것들이, 그리고 그걸 말하는 게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아요. , 차라리 그걸 꺼내놓는 게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혼자 속으로 품고 있을 때보다 ‘발설’될 때 더 작아진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사람들이 당신의 그림에 열망하면서도, 당신을 닮았다는 소리를 칭찬으로 여기지 않는게 불편해서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죽음’이라는 단어에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 단어를 입체적으로 보길 원해서요. 우리는 웰빙이 아니라 웰다잉을 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는 걸 한 번쯤은 말해보고 싶어서요. 당신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있는 지금의 저는 어쩌면 비겁할지 몰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어떻게든 말해보고 싶었어요.


빈센트 당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처럼, 우린 언제, 왜,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죽어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게 이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는데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에 이 편지를 써봐요.


조금은 엉망진창인 글이 되어버렸지만, 이만 줄일게요 빈센트. 여기에 다 적을 순 없지만, 요즘은 도무지 뭔가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그냥 이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의의를 둘래요.


우리는 그림으로, 글로, 또 노래로 다시 만나요. 여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거든요.


from. um___br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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