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기작 Oct 18. 2018

<시계태엽 오렌지> 속 위험한 처벌 방법

거세당한 악인을 통해 보여준 시스템의 위험성. 

10대 소년 알렉스. 그는 우유에 마약을 탄 음료를 마시며 친구들과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문제아였습니다. 늙은 노숙자를 때리고, 또래 갱단과 싸우는 건 약과였지요. 그는 훔친 차를 타고 어느 작가의 집을 습격해, 작가를 폭행하고 그의 아내를 눈 앞에서 강간했습니다. 강간도중, 알렉스는 ‘singing in the rain’을 흥얼거릴 정도로 죄책감이 없었죠.

(이렇게 악랄한 그에겐 어울리지 않은 취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토벤 음악 감상’. 추악한 행동만 일삼으면서, 음악은 고상하게 들었답니다.) 


그런 그가 얼마 후 살인죄로 기소돼 14년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과부를 죽였을 때, 함께 다니는 동료들의 배신으로 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이죠. 감옥에 갇힌 알렉스. 그는 14년 동안 감옥에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감형되는 대신, 그는 ‘루드비코 요법’이란 교화 프로그램의 실험 대상자가 됐죠. 루드비코 요법은 각종 선정적인 행동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투여하는 치료였는데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실험을 받은 사람은 폭력적인 상황이나 성행위를 상상만 하더라도 고통을 겪게 되었답니다. 게다가 이 요법의 시행도중엔, 알렉스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기에 알렉스는 이 요법으로 범죄도, 취미도 즐기지 못하는 몸이 됐지요.


실험의 성공으로 단 2년만에 석방하게 된 알렉스. 이제 정상적으로 살아야 할 텐데요. 다른 의미로 그의 삶은 비뚤어졌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았고,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친구들은 경찰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과거 라이벌이었던 갱단은 그를 초주검으로 만들었죠.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다 만신창이가 된 알렉스는 살기 위해 외딴 곳에 있는 집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알렉스가 찾아간 집엔 다리가 마비된 남자가 있었는데요. 집 주인의 정체는 알렉스가 과거에 폭행했던 작가였습니다. 부인은 알렉스에게 성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폭행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마비된 채 혼자 살고 있었죠. 작가는 처음엔 알렉스가 본인의 원수인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알렉스가 샤워를 하며 ‘Singin' In The Rain’을 흥얼거리자, 그때서야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죠. 


그러자 작가는 복수심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알렉스를 방안에 가두고 베토벤 교향곡을 틀었습니다. 흘러나오는 베토벤 음악에 몸서리치던 알렉스. 결국 그는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말았지요. 과연 알렉스는 석방되자마자 이렇게 죽게 되는 걸까요?




지금까지의 내용은 스탠리 큐브릭의 1971년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속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은 앤서니 버지스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다룬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요. 작품에서 어두운 미래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져서 일까요? 처음 개봉했을 때 영국에선 <시계태엽 오렌지> 속 장면을 모방한 여러 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예컨대 알렉스의 옷차림을 흉내 낸 소년이 어린 아이를 폭행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소녀를 강간하기도 했지요. 이에 감독은 영국에서 영화 상영을 철회했습니다. 이후 27년 동안 이 영화는 영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답니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모방범죄까지 야기한 끔직한 영화 속 광경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일단 분명한 건 감독은 ‘폭력을 미화’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떤 작품들이 누군가를 해치는 인물의 행동을 통해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다릅니다. 이 작품에선 폭력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들이 숱하게 등장하죠. 가장 대표적인 장치는 영화에 깔리는 음악입니다. 영화엔 베토벤과 로시니가 작곡한 우아한 노래들이 흘러 나오는데요. 이러한 곡들은 알렉스가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 등장합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곡이 의도적으로 배치된 거라 볼 수 있죠. 이를 통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동떨어진 느낌이 주는 ‘어색함’이, 화면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이 어색함은 아름다운 선율과 대비되는 ‘눈 앞의 폭력이 그려내는 잔혹성’을 두드러지게 느끼도록 만들죠. 


물론 누군가는 영화를 모방한 범죄가 발생했기에, 이러한 폭력적인 묘사가 진정 필요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추측하건대 순수 악 그 자체인 인물이 제시된 이유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형벌’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관객에게 묻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인물이 루드비코 요법이란 형벌 - 즉 국가가 만든 폭력- 에 쉽게 통제되고 그 힘을 잃습니다. 설핏 루드비코 요법은 악인을 갱생시키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갱생을 시킨다는 건, 범죄를 저지른 개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루드비코 요법은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택할 자유’ 자체를 없앤 채, 무작정 악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복종시키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범죄자에게 의지가 필요한가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생각이란 가장 기본적인 자유마저 통제하는 국가의 힘이, 단순히 범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전적 의미는 ‘과학에 의해서 개성을 상실하고 로봇화한 인간’입니다. 기술을 지닌 국가에 의해 ‘악’을 거세당한 알렉스를 상징하는 제목이죠. 그렇다고 감독이 영화를 통해 알렉스를 단순히 동정하거나 루드비코 요법을 무조건 비판한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린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합니다.


'극악무도한 인간이 활개 칠 수 있는 사회'와 '인간성을 쉬이 박탈할 수 있는 시스템' 중 어떤 것이 더 우리 세상에 위험할지.

매거진의 이전글 고어 영화는 왜 생겨났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