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날과 다름없는 저녁, 갑자기 ‘화재경보’가 울렸다. 이상한 냄새도 스멀스멀 나고 있었으니 경보 오작동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생각에 현관문을 열어보니 아파트 계단에 뿌옇게 연기도 보였다. 급하게 119에 전화를 했다. 당황하고 놀란 마음이라 우리 집 주소 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사이 몇몇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연기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보였다. 옆집 젊은 아빠는 맨발이었고, 우리 집 남편 또한 양말 바람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른 집 사람들도 하나 둘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옷을 껴입는 둥 마는 둥 전기며 가스불을 점검하고, 강아지 미키를 한 팔에 안은 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신발을 꿰찬 남편 또한 시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쏜살같이 밖으로 향했다.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게 무슨 일인지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리 아파트는 한 층에 3집씩이고, 1,3호 두 집은 가운데 2호 집을 마주 보는 형태로 현관문이 나 있다. 우리 층 2호 젊은 엄마 아빠는 이제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안고, 자기 집에서 타는 냄새가 아주 많이 났다고 전했다. 다급히 1호 가족을 둘러봤지만, 아직 퇴근 전이신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윗집도 마찬가지로 집안이 컴컴한 게 아직 퇴근 전인 것 같았다.
문득 우리 집 미키와 이름이 같은 윗집 또 다른 미키가 생각났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아지는 혼자 있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얼마 전 누수 문제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터라 급한 마음에 윗집에 전화를 해봤다. 받지 않았다.
이렇게 어리둥절, 허둥지둥하는 사이 사이렌도 요란하게 소방차가 도착했고, 완전무장한 소방관들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초조하게 밖에서 서성대는데, 이 모든 일이 현실 같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는 꺼졌지만 불빛은 번쩍번쩍 대고, 어느 집인지 어린 여자애가 겁에 질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처 겉옷도 못 챙기고 내복 바람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 딸은 동영상을 열심히 찍고 있었고, 휠체어에 앉은 시어머니는 춥다고 미키를 꼭 껴안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몇 분 지나 로비에서 미어캣 마냥 서있던 아저씨 하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나와 다 정리된 것 같다고 전했다. 무슨 일이었냐고 다들 설왕설래하는 사이, 10명이 넘는 소방관들이 밖으로 나왔고, 그중 한 분이 ‘이제 집으로 들어가셔도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어느 집에서 불이 날 뻔했지만 다 정리되었다고 전해주었다.
헐레벌떡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두들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 집 층에 올라와보니 1호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소방관들이 몇 명 보였다. 생각도 못했는데, 원인은 우리 앞집이었던 것이다. 1호 아주머니가 미안한 얼굴로 뛰어나와, 빨래를 삶는다고 올려놓고 깜빡 나갔다 왔는데 그게 다 타버려 이 사달이 났다고 설명해 주었다. 연기가 너무 심해 환기를 하려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그게 복도로 빠져나와 화재경보기가 울렸던 거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층 2호 3호가 냄새를 감지하고 제일 먼저 뛰어나왔던 것 같다. 바로 옆집에서 있었던 일이니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두들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는 소리를 1호도 들었을 텐데,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분도 너무 당황하셔서 순간적 판단이 어려우셨을 것 같긴 하다. 새삼 1호 아주머니도 ‘깜빡깜빡하실 만큼 연세가 드셨구나’라는 측은지심도 들었다.
어쨌든 모든 게 해결되고 집으로 들어서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남편은 본인의 순간적 기지가 빛났다고 자화자찬했고, 딸은 자기가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며 ‘역대급 사건’을 친구들에게 전하느라 바빴다. 시어머니는 급해도 집안에 있는 돈이나 패물은 가지고 나갔어야 한다고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갑자기 전화해 궁금해할 윗집에 문자를 보내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9시에 예정되어 있던 온라인 독서토론 모임도 과감히 재끼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큰 재난을 무사히 이겨냈으니 남편과 와인이라도 마셔야 했다.
결국 평정심을 잃지 않고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간 건 우리 집 강아지 미키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