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 걸어도 걸어도>는 표면상으로 15년 전에 죽은 아들의 기일에 한 가족이 모여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잔잔한 수면 아래에는 가족이란 얽힘 속에 감추어진 비밀과 아픔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일본의 소박한 가정집과 주변 산책로가 배경이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는 금방 터질 것 같은 폭탄이 시간을 재촉한다. 가족이 쏟아내는 언어들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긴장감은 가끔씩 잔인한 비수처럼 꽂힌다.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 아픔을 원죄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감독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시골의사 요코야마 씨 집안 가족들은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고향집에 모인다. 준페이는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 요시오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형에게 콤플렉스를 가진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 살고 있는 지나미와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집에 온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친정에서 살려는 딸 지나미는 집에 와서 그 집을 리모델링하여 살고 싶어 한다. 그 분위기가 화목하지만은 않다.
차남이 데리고 온 지나미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맘에 들려고 애쓰지만 엄마의 본심과 맞지 않는다. 15년 전 장남이 죽은 뒤로 쉽게 풀리지 않는 가족들 간의 소소한 기억들이 가끔씩 떨어지는 무거운 기억의 돌에 부딪혀 충돌하는 듯하지만 계속 어긋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제목은 1970년대에 히트했던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중요한 소재이며 상징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가 다른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몰래 불렀던 노래이며, 어머니가 숨어서 슬픔과 분노의 마음으로 들었던 노래다. 아버지는 며느리 앞에서 클래식을 좋아하고 비틀스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좋아한다고 허세를 부리며 말하고 일본의 트로트 엔까에 속하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는 사랑하고 싶을 때 부른다.
남편의 외도 장면에서 흘러나온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몇십 년 동안 숨어서 몰래 들으며 분노를 다스렸던 어머니. 그 비밀을 이제야 아무렇지도 않게 목욕하고 있는 남편에게 무심하게 풀어놓는 어머니. 그때 왜 그녀는 그 사실을 남편에게 따지지 않았을까? 그때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었으리라. 어머니의 삶이 슬프다.
엄마가 차남에게 장남이 살린 아이가 계속 조문 와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을 죽인 그 아이가 1년에 한 번쯤 여기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정도쯤이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벌을 받지는 않을 거야.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하는 거야.”
이 대사는 참으로 아프고 쓸쓸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를 조문 오게 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증오가 사라진다면... 슬픔만 있다면... 얼마나 또 힘든 삶인가! 여기에서 용서라는 말은 화해의 제스처일 뿐 그 이상의 역할을 못 한다.
우리의 삶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아들이 구해 준 아이는 살이 100Kg이 넘을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 듯하다.
타일을 고쳐주겠다고 큰소리치던 사위는 잠만 자다 가버리고
‘1년에 한 번만 찾아와도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아들, 다음에는 자고 가지 말자고 말하는 차남의 아내 등 모두들 제 생각하기에 바쁘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장남 준페이의 죽음을 기억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항상 누군가 죽거나 무언가 상실한 다음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의 영화는 죽음, 상실 그 자체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건 후 퍼져 나오는 파장으로 영향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가족이란 존재 자체와 죽음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다루는 가족 사이의 불협화음 오해 등은 죽은 준페이를 뛰어넘어 현재 가족의 관계를 되묻는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어머니의 아픔이 칼처럼 느껴지고 아버지의 삶은 타버린 장작처럼 처량하다. <걸어도 걸어도>는 보편적인 감흥을 주기도 하지만 삶과 가족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통찰의 힘을 주는 영화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