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지구 상에 수도 없이 일어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 영화, 시, 그림도 수만 가지다. 이런 예술적 표현 속에서 전쟁으로 남성은 영웅이 되기도 하지만 여자는 피해자로 전락하거나 아무 존재 감 없이 묻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에서 피해자로 묻혀있던 여성들의 고통과 상처를 칸미르 발라고 감독이 회화적인 표현으로 스크린에 올렸다. 91년생 천재 러시아 출신 감독은 7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었다. 그 외에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FIPRESCI)상과 감독상 수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 26개 영화제 초청과 18개 부문 수상 기록을 이어갔다.
이 작품은 특히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참고로 만들어졌다. 제2차 대전에 참여한 여성 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책은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영화 첫 화면은 암전 된 상태에서 ''꺼엌, 크, 케, 커, 크, 크'' 소리만 들린다. 무슨 소리일까 정말 침이 마르도록 궁금하다. 바로 열리는 화면에는 키가 큰 여인 이야 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서있다. 스크린 전체를 키가 커 빈폴 즉 '키다리'로 불리는 < 이야>와 작은 일반 사람들과의 대비로 채워진다. 그 대비는 이야를 부각시키면서 그녀가 가진 장애에 주목하게 한다. 전쟁 중 뇌진탕으로 쓰러지면서 얻은 후유증으로 가끔 정신을 놓는 장면이다. 이 설정은 총을 맞고 죽고 피를 흘리는 참상보다 더 잔인한 효과를 부른다.
1945년 레닌그라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이야는 아들 '파슈카'와 힘겹게 살아간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이야’ 는 전쟁에서 뇌진탕으로 쓰러져 전역했다. 뇌진탕 후유증으로 갑자기 온몸이 굳어 버려 잠깐씩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 날 아들 ‘파슈카’와 놀이를 하다 이야는 몸이 굳어버린다. 이때 아이는 품안에 깔려있었다. 아이는 이야 밑에서 버둥거리다 숨을 멈춘다. 결국 이야의 뇌진탕 후유증이 아들을 죽인 셈이다.
전쟁에서 지원병으로 일하던 둘도 없는 친구 ‘마샤’가 돌아오면서 두 사람의 비밀이 드러난다. 이야가 돌보던 아들 파슈카는 마샤의 아들이었다. 마샤는 아이를 갖고 싶어도 이제는 갖을 수가 없다. 마샤는 유산판 파편이 자궁이 있는 위치에 박혀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할 수 없게 되었다. 마샤는 참전 후유증으로 코피를 흘리기도 하고 탈진으로 기절하기도 한다.
군대에서 이야는 죽어가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군인들을 안락사시키는 일을 했었다. 그녀의 과거 직책을 알고 병원에서 그녀에게 안락사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야의 모습은 전쟁 후 상처가 심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군인들의 모습과 함께 고통을 가중시킨다. 이야가 근무하는 병원 자체가 전쟁 후 겪는 후유증의 집합체로 보인다.
감독은 사건과 갈등으로 시나리오를 요란스럽게 흔들지 않는다. 과감하게 회화적인 미장센과 색채로 효과를 끌어올린다. 이야가 병원에서 벗어나 평상복을 입고 생활하는 순간 언어는 색채로 바뀐다. 진녹색 벽과 진주홍빛 벽지들과 바탕을 이루는 황토색의 조화는 중세 화가들의 그림들이 연상된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얀 반 에이크 그림들 특히 <이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을 연상시키는데 영화 전문가 승문보 씨는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과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화폭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어떤 화가이든 감독은 분명히 밝히지 않는바, 중세 화가들의 색채와 조명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된다. 특히 이야와 마샤가 갔던 공중목욕탕은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작품<터키탕>을 연상시킨다.
정성일 영화 평론가는 "감독이 17세기 플랑드르 화법처럼 촬영할 것과 유화 물감을 덧칠한 것처럼 찍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면 마치 화면의 두께가 느껴진다”라고 해설하며 영화를 볼 때 특유의 질감을 봐달라고 당부했다.
감독은 색채로도 관객의 이해를 종용한다. 두 여인 이야와 마샤는 전쟁 전우다. 전쟁 후 후유증으로 이야는 뇌졸중을 마샤는 불임이라는 병명을 앓고 있다. 살아야 할 이유들을 그들은 찾아야 한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번갈아 가며 초록과 빨간색 옷으로 입는다. 키다리 이야는 아들 파슈카와 같이 살 때는 안정적인 초록의 스웨터를 입고 후반에 삶의 욕망이 살아나면서 빨간색 톤으로 바뀐다.
전쟁에서 돌아온 마샤는 초반에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생활을 한다. 이때는 빨간색 옷을 주로 입고 있으며 점차 이야의 곁에서 살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면서 초록색 옷으로 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빨간색은 열정과 경고의 의미가 있고 초록색에는 안정과 위협의 의미가 섞여있다. 영화 속 색채는 어느덧 서로에게 스며들어 바뀌어진 색채로 두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영향받고 공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부분 전쟁 이야기 중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남성들의 성상품이 되어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뿐이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훈장도 받고 전투에서 벌어진 영웅담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은 오히려 감추어야 할 일들이 많다.
두 여인은 서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희망과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설명을 참고로 첨부합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가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고 요즘 관객들은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빈폴>은 설명을 거절하고, 분석에 저항하는 영화 같다”라고 밝히며 “처음으로 감독이 배우들에게 요구한 것은 빨리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발라고프 감독은 대사는 내용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고 배웠고,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을 위해 장면을 읽어주고 싶지 않았다고 인터뷰했다”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또 촬영에 대해 “두 가지 미학으로 촬영된 영화이다. 수많은 장면에서 망원렌즈와 롱테이크를 사용했다. 비좁은 방에서도 최대한 멀리서 찍으려고 의도한 게 보이고, 배우들이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선택된 촬영 기법일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또 “촬영 감독과 미술 감독 둘 다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에 대해서는 “<빈폴>은 우리를 힘겨운 주제의 논쟁으로 데려가는 영화이다. ‘이야’가 안락사를 시키며 ‘이해할 수 있는 죄’를 짓는 동시에 ‘마샤’는 벌을 내리듯이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벌’을 내리며 「죄와 벌」을 연상시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는 흥미 있는 해설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