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는 '홍보'만 잘 하면 되잖아
앞으로 펼쳐질 마케팅 활동의 초석을 닦기 위해 브랜드 전략, 마케팅 전략인지 모를 문서를 몇 번이고 고치는 동안 눈에 들어온 또다른 문제. 고객의 '앱 사용 데이터'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 이것은 곧 프로덕트와 관련해 개발, 디자인, 마케팅, 전략 등의 업무를 할 때 의사결정 기준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데이터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고객의 이름, 연락처, 접속시간 정도의 간단한 로그 데이터였기에 앱의 사용성이 어떠한지를 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찌저찌 브랜드 문서는 정리했고 전략도 어느정도 틀을 잡아가고 있었지만 마케팅에 필요한 콘텐츠 제작을 하기 위해 이 앱의 소구점이 뭔지를 계속 궁금해하던 차였다. 데이터가 왜 없었는지 이유를 찾아보자면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첫째로는 사내에서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고, 둘째로는 알더라도 데이터를 맡아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사업 초기 단계에 실적 하나하나가 중요한 때라 대기업과 협업해 제작중이던 프로젝트의 우선순위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업무에 불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도 IT를 모르기는 피차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회사에서 크게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했다. 따지더라도 뭘 알아야 따진다고, 분석 툴을 다뤄본 것은 GA가 다였다. 설상가상으로 입사 직후 코로나19 사태가 터졌고 오프라인 영업을 위주로 고객을 조금씩 유치하고 있었으니 데이터라고 부를 만한 절대적인 양도 현저히 부족했다. 마케팅 업무를 하는 데 데이터 분석의 중요성이 작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설득에 필요한 무기가 없으니 우리가 믿을 구석은 결국 VOC 뿐이었다.
서비스 초기에는 VOC를 수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일단 이용자수가 적으니 VOC도 적을 뿐더러 보수적인 분야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앱 서비스라 생소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대 사용자를 중심으로 사용자가 차츰 늘어가면서 VOC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그렇게 늘어난 VOC를 수집하는 일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업팀 한 명이 전화로 들어오는 VOC만을 관리했다. 그러다 카카오채널을 오픈하고 앱스토어 리뷰, 이메일, 채널톡 등 접점이 많아지자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양이 되어갔다. CS 인력이 충원되어 담당자가 둘이 되었지만 VOC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만이 일의 끝은 아니었다.
기록된 VOC는 계속 쌓여가는데, 그걸 제품에 반영할 시간은 없었다. CX라는 거창한 개념은 고사하고 회사 내부에서는 프로덕트 개선에 대한 필요성조차 합의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떤 VOC를 반영하고 반영하지 않을지를 논의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쌓이는 신규 개발 프로젝트와 기업 고객 VOC 위주로만 반영하는 유지보수에 개발팀도 비개발팀도 지쳐가고 있었다. 이에 더해서 커머스 기능까지 추가되고 나니 주문 관련 CS를 처리해내는데만도 바빠서 VOC 관리 문서는 어느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나는 마치 어두운 동굴에서 라이트를 켜고 더듬더듬 길을 찾는 심정으로 마케팅에 필요한 VOC를 스스로 정리했다. 어쨌든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벤트를 고민하고 실행했다. 프로젝트를 확신 없이 진행한 적도 많았다. 아예 이정표가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았지만 VOC를 유심히 지켜보다보니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게 계속 보였다. 그 때문에 서비스가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마케팅 활동 후에 서비스를 이탈하는 대부분의 사용자들을 지켜보면서 이 생각에 더욱 확신을 얻었다.
답답한 심정이 머리 끝까지 차오를 쯤에 대표님과 회의를 할 기회가 있어 대표님께 'VOC 문제' 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내가 담당자는 아니지만 VOC가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고 대부분 반영되지 않아서 기본적인 기능에도 문제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딴에는 스타트업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잘 들어주시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내뱉었던 말이지만 돌아오는 건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럴리가 없다, VOC 회의는 계속 하고 있는 게 아니냐'면서. 하지만 사실이라고 말씀드리니 내 눈앞에 즉시 각 팀 팀장들을 소환해 내 말이 진짜인지 물었다. 신입 마케터로서 업무상의 힘듦을 토로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순간 분란을 만든 사람이 된 것 같아 매우 당황스러웠다. 괜한 말을 꺼낸 걸 바로 후회했다.
그간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확인하니 안타깝게도 VOC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담당자들을 내보내고 대표님은 조용히 다시 말을 꺼냈다. 요지는 프로덕트에 관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페이스북을 예로 들며 페이스북의 미약했던 시작, 심각한 사용성이 몇 년을 걸쳐 개선되며 성공했다는 전설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우리 서비스도 이만하면 많이 발전한 거라는 말과 함께 '마케터라면 응당 서비스가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팔아야 한다' 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프로덕트에 대한 그의 애정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화하다보니 브랜딩 이야기도 하게 되었는데 대표님은 마케터가 브랜드까지 통제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난색을 표했다.
내 업무를 통째로 부정당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쁜 것도 있었지만, 가장 기분이 나빴던 건 '마케터'이기 때문에 제품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프로덕트 마켓 핏을 찾는게 가장 큰 목표인 스타트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마케터의 역할과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건 둘째치고 스타트업의 일원으로서 프로덕트에 대해 뭐라 말을 얹지 못한다는 건 더이상 발전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렸다. 분노를 꾸역꾸역 삼키며 '알겠습니다' 라는 마무리 멘트를 날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너무 큰 이상을 바란 걸까, 믿던 사람한테 뒷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회사 생활 자체가 얼얼하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꽤 자주 있었다. 되돌아보니 그와 나의 충돌 지점에는 항상 '브랜딩'이라는 주제가 있었다. 마케터가 염불 외듯 브랜드를 개선하자는 얘기를 자꾸 꺼내는 건 곧 경영 방식을 바꾸자는 이야기이니 대표님이 싫어할만도 했다는 게 지금의 결론이다. PO가 뭔지 몰랐지만 PO의 역할을 하고 있던 대표님이라면 더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브랜딩이라는 말로 경영 방식에 훈수를 둔 몹쓸 신입이 되고 말았지만 조직과 여러 방면으로 충돌했던 경험 덕분에 브랜딩을 한다는 게 뭔지 배웠다. 이전에는 그저 '행동 강령' 정도로 느껴졌던 브랜드 슬로건이 '경영 방식'을 정의하는 중요한 문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브랜드를 정의하는 건 회사를 정의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직의 '거부반응' 덕에 깨달음을 얻은 케이스라고나 할까.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스스로를 브랜드 마케터로 정의했기 때문에 내 일도 아닌 것에 이것저것 관여한다고 느낀 사람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회사를 모르고 프로덕트를 모르는데 마케팅을 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고객을 설득하기 위해서 마케터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2년 동안 멋대로 쑤시고 다닌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회사를 내가 원하는대로 100%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로 인해 바뀐 부분도 몇 군데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다고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