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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리담 Aug 20. 2023

#10. 폴리네시아와 친해치기

쿠알로아랜치, 폴리네시안문화센터, 포이까지

관광 2일 차. 아직 창밖은 어스름하게 푸르다. 자고 있는 워니를 두고 살금살금 조그만 주방으로 갔다. 드리퍼에 물을 붓고 커피가루를 크게 두 스푼 넣었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고소한 커피 향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든다. 부리나케 일어난 이유는 바로바로 무스비 도시락을 싸기 위해서. 한국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김과 후리카케, 그리고 고추참치가 빛을 발할 때가 왔다.


햇반을 후리카케와 섞어 밥틀에 넣어 꾹꾹 펴서 1단 지지바닥을 만들었다. 그 위에 스팸과 스크램블에그로 2,3단을 쌓아 올리고 화룡정점 고추참치를 넣은 후 새지 않게 밥으로 벽을 만들었다. 위에 편편한 밥뚜껑까지 만들고 김으로 한 번 더 싸면 사각김밥 같은 무스비 완성! 도시락통에 조심히 담아 보냉백에 넣었다. 그 사이 워니가 부스럭거리며 나왔다. 냄새에 호들갑을 떨더니 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시고는 또 호들갑을 떨며 대단해-를 외쳐주었다. 그녀는 나를 부리는 방법을 안다. 칭찬대마왕!


오늘도 상쾌하게 출발! 하려고 했으나 실패! 아침에 한 바탕 난리였다. 어젯밤에 주차한 차가 주차게이트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제 분명 주차티켓을 끊었는데 우리 차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경고등만 뜬다. 호출버튼을 눌렀더니 스피커 반대편에서 누군가의 짜증 섞인 hello가 들렸다. 지금 시간은 아침 7시. 그럴만하다. 그 사이 뒤에 기다리는 차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진땀을 뻘뻘 흘리며 후진해서 다른 차를 먼저 보내고 난 후에 드디어 게이트가 열려 진짜 출발! 컴컴한 주차장에서 나오자 창을 통해 화창한 햇살이 쏟아진다. 어제와 같은 운하길에서 어제와 같은 윤슬이 반짝인다. 오늘도 감동적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쿠알루아 랜치와 PCC가 있는 동북쪽이다. 차가 많은 출근길 고속도로를 지나자 어느새 어제와는 완전 다른 느낌의 이국적인 뷰였다. 쥐라기공원에 나올 것만 같은 융기된 산과 높은 침엽수들이 펼쳐진다. 양 옆으로 펼쳐지는 침엽수들이 계속되는 숲길을 달렸다. 그 뒤에는 그림자 덮인 융기된 산이 펼쳐진다. 낮게 뜬 해 덕에 산세 곳곳이 멋들어진 그림자가 드리웠다.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산을 양옆에 끼고 달리며 무스비를 먹다니, 초현실적이었다.


한참 달리자 오른쪽에는 바다가 보인다. 섬을 가로질러 동북쪽 해안가에 다 왔나 보다. 오는 길 내내 보았던 쥐라기 산들 중 하나에 자리 잡은 랜치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초입에는 수십 마리의 깨끗한 말들이 유유자적하게 여물을 먹고 있었다. 관광지에서 보던 파리가 꼬여 있는 빼싹 마른 말들만 보다가 가죽에서 윤기가 나고 배가 볼록한 말을 보니 기분이 참 좋다. 살금살금 만져보았는데 여물 먹기에 푹 빠져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너무너무 순하고 귀엽다. 이래서 사람들이 말을 좋아하는 것이구나. 랜치 예약할 때만 해도 워니에게 가기 싫다고 했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말들을 보고 짱 신나 버렸다 호호


시간이 되어 지프투어 출발! 레아라는 가이드가 함께 지프를 타고 하와이의 역사에 대해 얘기를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레아는 하와이인이었고 본인의 핏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와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듣는 하와이의 역사, 그리고 하와이 단어들의 의미에 관심이 갔다. 하와이는 인디언이 그랬듯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그들의 문화를 잃어간다. 하와이 왕가가 미국에 의해 멸망하고, 유럽인들이 몰고 온 모기에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고. 살아남은 이들도 2등 시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알로하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들은 알로하는 단순히 사랑의 의미가 아닌 더 깊은 말을 담고 있었다. 말 뜻 그대로의 aloha는 숨 쉬는 것을 공유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Ha는 breath를, Alo는 Face, presence를 뜻하는데, 이를 합친 Alo+ha는 presence of breath, the breath of life 가 된다. 하와이 문화에서는 숨을 쉬는 행위에 의미를 둔다. 숨을 쉰다는 것은 곧 삶을 산다는 것으로, 숨 쉬는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aloha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실현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행동이며 나아가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내고 받는 행위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하와이의 aloha가 다른 폴리네시아 섬에서는 모음만 바꾸어서 같은 의미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랑의 마음이 폴리네시아 전체에 퍼져 있다.


알로하의 단어 속에 자리 잡은 숨, “Ha"는 감사하다는 뜻에도 쓰인다. 하와이 말로 감사하다는 말은 "Mahalo"라고 하는데, 종종 단순한 감사함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 또한 어원을 이해하고 보면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Mahalo의 뜻을 직역하면 내 숨을 당신과 나눌게요(share my breath with you)가 된다. 즉 나의 숨과 생명, 영혼을 나눔으로써 감사함을 표한다. 고마움의 표현으로 영혼을 나눈다 말하는 민족, 강한 풍채와 달리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숨과 생명을 나누는 폴리네시아 민족. 나는 이 민족이 조금 좋다.


레아는 쿠알로아 목장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오기 전엔 돈 쓸어 담을 것 같던 쿠알로아의 주인이 부러웠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실 이 목장은 특정 개인이 아닌 단체가 소유하는 것 같았고 돈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 같았다. 하와이왕이 과거에 영국인에게 단돈 150달러에 팔았던 이 산을 어느 가문과 하와이왕의 후손이 힘을 합쳐 되샀다고 한다. 그들의 힘으로 되찾은 이 땅은 하와이의 토착 생태계 보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더러워진 바닷물을 되살리기 위해 굴 양식장을 만들어 바다를 정화시킨다. 망고나 구아버를 조금씩 없애고 하와이의 토착 식물을 심는다. 우리가 하와이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흰색 Frangipani 꽃조차 본디 하와이 것이 아니라 미국 문물 유입과 함께 들어온 것이라 한다. 때문에 이 꽃이 아닌 하와이의 토착 나무를 심었다. 단순히 돈만 생각하고 부러워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들의 운동으로 하와이 원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한적한 숲 속에서 진행된 투어를 마치고 나서 정말 정말 궁금했던 포이팩토리로 이동했다. 하와이 전통음식을 파는 곳으로 내가 좋아하는 백종원 스푸파와 넷플릭스 길 위의 셰프들 두 프로그램 모두에 나와서 기대했다. 엄청 외진 곳에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가볼 수 있을까 했는데 다행히 랜치와 정말 가까웠다. 외진 곳인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곧이어 수많은 폴리네시아를 담은 책에서 말했던 요리들이 한 그릇에 담겨 나왔다. 책에서는 맛을 글로 읽을 수밖에 없어서 답답했는데 드디어 맛볼 수 있었다.


포이는 타로로 만든 죽과 떡 사이의 식감으로 밥 대신 먹기도 하는 것으로 듀크 카하나모쿠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하와이로 돌아오는 배의 갑판 위에서 친구들을 보자 손가락으로 포이를 떠먹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수영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쥐고 칠 개월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의외로 내가 먹은 포이는 약간의 무 향이 나는 심심한 찹쌀죽 같은 식감이었다. 아무래도 밥 대용으로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기대했던 달콤한 맛이은 아니었다. 라우라우는 토란 잎에 싸서 삶은 돼지고기로 책에서 보면 연회나 파티를 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토란잎이 향긋하게 배어 나오는 감자탕 고기를 먹는 느낌이었다. 과거 식자가 풍부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특별한 음식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깔루아피그는 누가 봐도 풀드포크였다. 마지막으로 바밤바깥은 맛의 아이스크림도 맛보았다. 전반적으로 간이 세지 않고 심심한 편이었다. 자극적인 현대음식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조금 밍밍했지만 귀한 음식들을 먹어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폴리네시아 일부 섬의 여자들은 귀한 돼지고기와 바나나는 먹는 것이 금지되었었다 한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단돈 20달러에 온갖 진수성찬을 맛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한 맘이다.


조금 더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너무 예쁜 비치파크에 멈춰 섰다. 쿠알로아비치파크. 한적하고 아름답다. 몇몇 신혼부부들이 사진사를 대동해서 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비치타월을 깔고 누워서 책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다른 신혼부부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아직도 세상은 아름답다. 눈을 잠시 감자 습기 없는 산뜻한 바람이 나를 스친다. 눈을 감은 세상이 꿈인 건지 눈을 뜬 세상이 꿈인 건지 헷갈린다. 이대로 세상이 멈추었으면 싶다. 아아 배부르고 행복하다.


하와이 오기 전부터 가고 싶었던 폴리네시안 문화센터(PCC, Polynesian culture center)에 도착했다. 폴리네시아 문화에 한참 관심이 생겼어서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입장료가 10만 원이라서 망설였지만 결국 갔다. 가기 정말 잘한 것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비치파크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이곳은 각 부족을 작은 섬나라로 만들고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체험을 하는 콘셉트이었다. 각 마을마다 음식체험, 타투체험, 훌라 체험 등 체험행사를 하고 30분마다 공연을 했다. 놀이기구는 없었지만 에버랜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사모아 섬에서 스탠드업코미디언 같은 아저씨가 사모아의 문화를 설명했는데 너무 웃겼다. 사모아에서는 남자가 요리를 했다고 한다. 그에 걸맞게 허리에 사롱을 걸친 장정들이 요리를 해서 나누어주고 있었다. 코코넛밀크와 끓인 브레드프루트(빵나무)였다. 브레드프루트는 폴리네시아에서 타로와 함께 주식이 된 음식이었는데 책에서 너무나 궁금했던 맛이었다. 나무에서 나는 빵이라니! 열매에서 빵맛이 난다니,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잔뜩 기대하고 줄을 서 받아먹었다. 짭짤한 양념의 코코넛밀크에 덮힌 빵나무열매는 빵보다는 감자와 같은 식감이었다. 포슬포슬하게 잘 삶아진 감자 같은 빵나무를 먹고 나자 한쪽에서는 불쇼 준비가 한참이었다. 기다란 창 양 쪽에 불을 붙이고 그 불을 휘두르며 묘기를 펼친다. 기둥을 던졌다가 잡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멋지다.


하지만 가장 넋을 놓고 봤던 것은 아오테아로아(Aotearoa, 뉴질랜드의 폴리네시안 이름)의 공연이었다. 아오테아로아 전통 춤과 악기를 연주했는데, 무대 위 공연하는 한 소녀의 집중한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흑백의 프랑스누아르 영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큰 눈과 입으로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 냈다. 나무막대를 던질 때 집중하는 표정, 춤을 출 때 환히 웃는 표정, 다른 사람이 춤출 때 바라보는 표정 등. 나는 어느새 그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PCC 또한 폴리네시아 민족의 안녕을 돕고 있었다. PCC에서 일하고 공연하는 80%의 사람들은 대학생이라고 한다. 뉴질랜드, 사모아 등에 살고 있는 폴리네시아 인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며 등록금을 모으고 지원받아 학교를 다니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곳 무대 중 한 소녀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미국, 뉴질랜드 등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문화에 섞여있지만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도록 기억해야 한다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인으로서의 뿌리를 잃지 않도록 PCC가 그 선순환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나왔다. 뭔가 허기진데 뭐가 먹고 싶은 지 모를 때는 치즈버거다. 다행히 바로 옆에 맥도널드가 있었다. 그런데 유레카! 하와이에서 먹은 것 중 손꼽히게 맛있었다! 의외의 곳에서 치즈버거 맛집을 발견했다. 케첩 뿌린 치즈버거와 바삭하게 튀긴 감자튀김을 먹고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초6 때 듣던 노래 잔뜩 들었다. 김형중 좋은 사람, 보아 아틀란티스 소녀 등등. 오늘도 까만 길 노란 가로등 아래에서 열창했다. 오늘도 너무 멋진 하루!!


그렇지만... 이제 관광은 그만하고 싶어... 관광도 노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정말 빡빡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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