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셋을 마무리하며 1

by 담다리담

연말에 쓴 초안을 묵히고 묵혀 봄이 한창인 이제야 꺼냈다.


나에게는 연말 리추얼이 있다. 연말마다 텀블벅에서 연말정산 책을 사서 일년을 정리한다. 시작한지는 어언 6년째, 독서모임 친구들과 같이 진행한 지는 이제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내 한 해를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것이 점점 의미 있는 일이 되어간다. 이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지조차 뚜렷하게 알지 못해서 이렇게 한 번씩 끊어주고 목표를 되돌아보는 것이 없어서는 안될 일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분기마다 한 번씩 목표를 정하고 성과를 되돌아보는 것처럼 내 삶도 조금 더 체계적인 운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올해도 많은 일들을 치르면서 내 삶이 많이 흐트러진 것을 연말이 되어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명상과 모닝페이지를 매일같이 쓰고자 했던 연초의 다짐은 찾아볼 수 없었고 쇼츠 중독으로 전두엽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자제력과 집중력이 어느 때보다 부족했고 뱃살은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났다.



<두루두루 인간>

나는 두루두루 인간이다. 일도 운동도 인간관계도 요리도 글쓰기도 투자도 무난무난하게 어느 정도 잘 해야만 만족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때는 어느 하나 특출나게 잘 하는 것 없이 참 맘에 들지 않았는데, 살아보니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두루두루 할 줄 아는 것이 살아감에는 더 큰 자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실전형 올라운더다. 작년인가, 나의 장점이 뭐냐고 묻는 연말정산 책에 "뭐든 중간은 가는거다" 라고 적어두었다. 그 때는 그게 내 장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면에는 성실함이 있었다. 나는 비교적 성실한 인간인 것을 이제는 안다. 뭘 하든 끊임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성실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다.


<PO의 삶>

일을 할 때 배운 큰 두가지는 1/ 최적의 케이스만 생각해서는 안되며 항상 최악의 케이스를 염두에 두고 의사결정해야한다는 것이며, 2/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 일상생활에 점점 적용되고 있다. 준비를 할 때 최악의 상황까지 준비를 했을 때 나의 대처능력이 훨씬 더 좋은 것이 느껴진다. 준비할 때는 진이 빠지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진이 빠지게 된다. 즉,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쓰게 된다.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을 때 그의 말만 고스란히 믿기보다 내가 직접 테스트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식은 지금은 모든 일잘러들에게 통하는 방법인 것 같다. 직접 데이터를 까보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너무 중요하다. 어떤 소문이나 얘기를 들었을 때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공수를 귀찮아하지말자.


이처럼 일하는 방식은 내가 일상에서 행동하는 방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8년 전, 입사연수원에서 마케팅 상무님이 강연을 하신 적이 있다. 누군가 그녀에게 일과 가족사를 어떻게 병행하면 되냐고 물었고, 그녀는 가족사도 모두 업무처럼 하면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업무를 전문적으로 해내는 것처럼 시어머니 생신을 챙기는 일도 캘린더에 업무처럼 할일을 적어두고 해내면 된다고 말했다. 8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녀가 그 대답을 하던 장면을 종종 떠올리며 되새긴다. 나는 그 방식으로 결혼준비를 문제 없이 해 내고 있다. 결혼준비도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면 참 쉽다. 태스크를 나누어서 작은 일감으로 쪼개서 진행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할당하면 된다. PO로서의 내 역량은 확실히 일상생활을 할 때도 큰 도움이 된다.


<Life Phase2>

올해의 가장 큰 테마는 결혼이었다. 올해의 하반기는 결혼과 이사준비에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자기 결혼을 준비하게되었다. 5월부터 집을 알아보고 7월 말부터 본격 결혼 준비를 했다. 내 인생이 항상 그렇듯 모든 것은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진행되었다. 얼레벌레 진행하다 보니 어느 새 다음 달 결혼이다. 인생의 가장 큰 다음 스텝을 건너게 된다. 일을 시작하면서 인생의 chapter2라고 생각했고 이직과 이사를 동시에 하면서 chapter3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chapter4, 혹은 인생2장이 시작된다. 내년을 뒤돌아보며 나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미 안정성의 향기를 느낀다. 작년을 마무리할 때 즈음에는 내 인생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안정성이지만 막상 품에 안은 안정성은 생각보다도 너무 편하고 아늑해서 이대로 주저앉을까 두렵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아기 보의 방 같다.


<외모>

새로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맞추어 복장과 외모가 작년보다 고급스러워졌다. 생각지도 않은 명품들도 몇 개 생겼다. 내 돈 주고 사라면 절대 못 샀겠지만 얼떨결에 생기니 얼레벌레 좋은 곳에 외출할 때 써지긴한다. 살면서 처음으로 피부과를 꾸준히 다녀보았는데 역시 돈이 좋았다. 예뻐지는 것과는 별개로 관리받은 것이 티가 난다. 별로 꾸미지 않아도 만나는 사람마다 예뻐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5년 간 지지리도 꾸미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더 관리빨이 잘 받나보다. 아직 관리가 조금이라도 먹힐 때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듣는 별 의미 없는 외모 칭찬이 꽤나 나쁘지 않다. 고와진 피붓결을 보고 우리 엄마가 유난히 기뻐했다.


<결국 유니클로>

내 옷장에는 지난 몇 년 간 쳐다도 보지 않았던 옷들이 많다. 입사 초기에 샀던 옷들이 대부분인데 울코트, 트렌치코트, 블라우스 등이었다. 지난 5년간 내 스타일은 끝 없이 캐쥬얼하고 편한 옷 위주였으니 말이다. 재택을 하면서는 더더욱 옷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올 해 갑자기 격식 있는 자리에 갈 일이 많아졌다. 남자친구 부모님을 뵙는 자리, 상견례 자리 같이 어른들을 뵙는 자리가 많아지면서 옷장에 걸려만 있던 옛날 옷들을 찾았다. 꽤나 오래된 옷들인데도 아직 그럴싸했다. 딱 8년 전 입사할 때 큰 맘 먹고 샀던 띠어리 코트를 올 해 유난히 잘 입었다. 그 때문일까 띠어리의 옷을 올해 유난히 많이 샀다. 셋업으로 입을 원피스와 자켓, 가디건 등 종류별로 샀다.

살 때는 기분이 참 좋았는데, 모두 한 번씩만 딱 입었다. 옷장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그 옷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입을래도 입고 갈 데도 없다. 한 8년 후에 40대의 내가 입고는 잘 샀다고 좋아할 일인지 모른다. 오히려 오늘 당장 막상 손이 가는 건 유니클로의 옷. 오랫만에 들른 유니클로는 옷을 너무 잘 만들었다. 그 일본회사의 옷은 편하고 소재가 좋아서 손이 잘 간다. 나도 불매운동에 편승해서 오랫동안 그들의 옷을 찾지 않았었는데, 오랫만에 다시 찾은 그들의 옷은 짜증날 정도로 편하고 만족스러웠다. 구매할 때의 만족은 띠어리라면 입을 때의 만족은 유니클로다.



<내집>

집을 구할 때는 나는 말처럼 안정되지 못했다. 집을 구하는 일은 내가 계획한 것을 계속해서 빗겨나갔다. 내가 집을 알아볼 때는 집값이 한창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를 시기라 보는 집마다 너무 비싸게 느껴졌고 그마저도 두어 달 만에 억단위로 올라버렸다. 이처럼 상황이 내맘대로 되지 않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 모든 게 더 빨리 결정하지 못하고 밍기적댄 내 탓인 것 같았다. 자금계획이 모두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 더 결정을 쉽사리 할 수 없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때 바로 결정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그 때는 나와 남자친구의 취향을 잘 알지도 못했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 지 감이 잘 오지도 않았다. 그 때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보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나에게 꼭 필요한 조건에 확신이 없었고 가용자금에 대한 확신 또한 확실치 않았다.

결국은 돌고돌아 매수 대신 전세집을 구하게 되었다. 이 집은 너무 좋지만 굳이 이런 비싼 이자비용을 내고 좋은 전셋집에 살아야 했을까 하는 생각은 계속 든다. 이 돈을 잘 모아서 다음 집을 매수하는데 썼으면 좋았지 않을까 싶다. 시간에 쫓기며 의사결정을 하다보니 장기적으로는 후회할 의사결정을 한 것 같다. 매수할 때도 혹여나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물론 살면서 보니 부동산은 타이밍이지만, 그래도 큰 돈이 오가는만큼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2년 안에 실제로 매수를 하게 될 때는 더 좋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까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나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이해할 것이다.



<반짝반짝>

"눈이 빛난다"라는 것의 의미를 알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의 순간을 느꼈다. 오랫만에 옛직장상사를 만나서 여느 때처럼 커리어와 이직 얘기를 줄기차게 하던 차에, 집 얘기가 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 신나게, 또 단호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봤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나도 내가 어떤 기분인 지를 느꼈다. 눈과 목소리에 에너지가 들어갔고 그 순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흡사 도파민돈다고 말하는 순간과 비슷했다. 커리어를 얘기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커리어는 의무감이 더 강한 느낌인 반면 집에 대해 얘기할 때는 그 자체로 재미있었다. 일은 그녀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것이고 부동산은 나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커리어보다 이게 인생에서 더 중요한 우선순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일로서 존경하는 사람이 나에게 부동산투자가 우선순위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그 말이 뇌리에 박혀 꽤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시간엄수>

작년의 연말정산에 나는 "늦는 건 싸가지 없는 거에요" 라고 적어두었다.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나의 고질병이다. 내 시간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약속시간이 닥치기 전까지끝까지 여유를 부리다가 결국 늦고 만다.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이 싫은 나머지 시간에 딱 맞춰서 가려고 하고 그래서 역으로 남의 시간을 빼앗고마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얼마나 내 생활 전반에 뿌리 깊게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업무중에 줌미팅 시작하는 00분이 될때까지 나는 다른 일을 하다 시간이 되어서야 들어간다. 그럼 보통 적게는 1분, 많으면 5분은 늦는다. 그나마 내가 호스트하는 미팅은 제 시간에 들어간다. 퇴근하고 약속시간에 갈 때도 이것만 하고 가야지 하다가 결국 15-30분은 늦는다.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시나리오만을 생각하고 여유시간을 두지 않는다. 그나마 주말 약속은 이제 잘 늦지 않지만 그래도 일이 있을 때 약속은 거의 항상 늦곤 한다.

나의 옛 상사를 만날 때 언젠가는 회의가 늦게 끝나서 한 시간을 늦은 적이 있다. 그녀와의 만남에서 두어 번은 더 늦었는데, 그녀가 편해질수록 나의 오랜 습관이 나오는 것이다. 세 번 연속 약속에 늦고서야 이를 진심으로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와의 만남은 3~6개월에 한 번이니 그럼 1년 동안 만난 모든 만남에서 늦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밍기적거리는 것은 내가 가장 고치고 싶은 버릇이다. 새로 생긴 나의 남편은 나와 반대다. 늦기 싫어서 30분은 미리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약속이 있을 때면 약속 외의 것은 약속을 위해서 우선순위를 바꾼다.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싶은 나와 달리 그는 약속시간이 되기 한참 전에 약속에 갈 방법을 시뮬레이션을 끝내 놓고는 늦지 않도록 준비한다. 보다 보면 저렇게 까지 해야하나 시간이 아깝지 않나 싶다가도 절대로 늦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

늦지 않는 것은 사람에 대한 배려의 기본이다. 아주 아주 기본적인 예의의 요소이다. 나의 시간과 그의 시간을 동등하게 소중하게 대한다는 뜻의 표현이다. 어떤 스타트업 투자자는 약속에 늦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어떤 변명이 있어도 말이다. 나중에 투자금을 회수할 때도 변명할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가장 첫번째는 사람이 늦지 않는 지 보는 것이다. 공감한다. 늦지 않는 것은 상대를 고려하는 지를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후기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단어가 실감이 난다. 요즘 내가 느끼는 세상은 자본은 자본으로 몰리는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된 세상이다. 미국주식이 핫하자 순식간에, 단 6개월만에 몇 조 원의 개인투자자 자본이 미장으로 몰려갔다. 부동산을 보면 그 경향은 더 두드러진다. 비싼 것들만 더 많이 오른다. 돈이 돈을 벌어주는 세상인 것을 이제야 뒤늦게 진정으로 깨달았다. 돈이란 모으고 뭉치고 굴려야 늘어나는 아이스볼같은 것이다. 내가 사는 내내 자본주의가 유지될 지도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헝거게임에서 보여준 부의 쏠림현상이 끝장나는 그런 사회가 될 것 같다. 헝거게임에서 구역별로 부의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이미 지역별로 부의 차이가 있고 이는 점점 심화되고 있다. 비싼 동네만 더 비싸지는 현황이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거센 바람이 불어올까?


<기록하고 싶다>

기록하고 싶다. 내 삶에서 느끼는 작은 기쁨과 괴로움과 생각의 조각들을 기록하고 싶다. 블로그에라도 브런치에라도 어디에라도 기록하고 싶다. 내가 공부하는 것, 내가 본 것들, 모두 기록하고 싶다. 기록에의 욕구는 이렇게도 지난하게도 계속되는데 막상 행동하지 않는 나는 참 게으르다. 막상 마음 깊은 곳 부터는 다른 우선순위들이 넘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25년은 나를 다시 되찾는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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