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를 앞서 겪는 이들의 복잡다단한 마음
요새 자주 듣는 단어 중 하나가 ‘AI 모먼트'다. 모먼트(moment)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결정되는 근거를 뜻한다. 지금 순간이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 토요일부터 시작된, OpenAI의 샘 알트만 해고는 분명 중대한 AI 모먼트일 것이다. 뭐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AI를 접하는 4차 산업 역군들의 사적인 AI 모먼트는 무엇일까. 최근 많이 웃은 건 ChatGPT에게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소원이셨어”를 프롬프트에 넣으면 답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AI는 수많은 온라인 상의 글에서 인간이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소원을 이뤄주지 못할 때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고 학습한 것 같다.
한동안 자주 들었던 ChatGPT 팁은, 반드시 말로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고맙다”거나, “덕분에”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이전에는 ChatGPT에게 역할을 부여하라는 팁도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AI지만 역할놀이에 심취할수록 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해낸다고 들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회사의 조직관리와 다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지난 11월 13일 뉴요커에는 ‘손코딩의 쇠락을 바라보는 코더 A coder consider the Waning Days of the Craft’라는 에세이가 올라왔다. 이 글을 쓴 프로그래머이자 작가인 James Somers는 ChatGPT 4.0을 활용해 친구와 토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코더에게 필요한 장인 정신과 AI로 비롯된 생산성 향상 사이에서 말이다.
“코딩은 늘 끝없이 깊고 풍부한 영역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나는 그것에 대한 추도문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시작한 글은 AI의 등장과 함께 “해결사가 된 기쁨과 만족감을 모두 앗아가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코딩의 시대는 끝난 걸까. 그의 결론은 아니다. 코딩은 스킬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 이 글의 결론 부분만 옮겨 본다.
not a skill, but a spirit
"저는 빅테크 기업들의 고전적인 코딩 테스트를 많이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상대적으로 잘하는 것은 구축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사용자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제 친구는 이것이 "쏘쏘한(그저그런) 프로그래머의 복수"로 칭할 수 있는 AI 모먼트라고 불렀습니다. 코딩 자체가 덜 중요해지기 시작하면서 더 부드러운 기술이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제 아이가 성인이 되면 우리는 손으로 계산한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였던 "컴퓨터"를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프로그래머"를 생각할 것입니다. C++ 또는 Python을 직접 입력하여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마치 펀치 카드에 바이너리 명령을 실행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쳐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제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농경 시대의 프로그래머들은 아마도 물레방아와 작물 변종에 능숙했을 것입니다. 뉴턴 시대에는 유리, 염료, 시간 계측에 집착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신경망에 관한 구전 역사를 읽고 있는데, 인터뷰한 사람들 중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이 라디오를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놀랐습니다. 어쩌면 다음 집단은 부모가 한때 블랙박스로 여겼던 AI의 내부에서 늦은 밤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코딩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킹**은 영원합니다."
*컴퓨터(Computer) : 한때 손으로 계산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디지털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 복잡한 문제가 있으면 수학자가 이를 수많은 작은 문제로 나눴다. 이를 컴퓨터(를 조작하는 사람)가 분담해서 동시에 계산을 진행한 것. 몇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까지 팀을 짜서 거대하고 복잡한 계산을 분담해서 동시에 처리한 것이다.
** 해킹(hacking) : 이 글의 초반에 저자는 로이드 블랭켄십이 1986년에 쓴 해커의 메니페스토(The Hacker’s Manifesto)에 “나의 범죄는 호기심(My crime is that of curiosity,)”이라는 문장을 언급하며, “지식이 곧 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해킹은 호기심과 지식을 뜻하며 그게 반드시 코딩 기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얼마 전 제주에서 열린 클라이밋 테크 스타트업 서밋에서 만난 AI 개발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문자와 책을 통해
인류의 지혜를 담고 학습해 왔습니다.
이제는 AI의 블랙박스에 그런 지혜가
담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AI 생태계 조성의 속도가 진짜 빠르다. OpenAI의 발표 일이주 만에 구글에서 GPTs가 검색되는 것만 7천여 개가 넘어가고 있다. 익숙한 AI 시대가 되면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경험하는 이 AI모먼트들을.
덧붙이는 딴소리
생성형 AI는 블랙박스 모델이다. 어떻게 답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지구상에 가장 작은 섬 이름을 묻는다면 ChatGPT는 답을 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가장 작은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매우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놨을 때, 우리는 입증이 너무 어려워 믿어 버리는 옵션을 선택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SF 영화에서 왜 자꾸 예언자들이 출몰하는가 했더니, 그게 바로 생성형 AI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