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건너 하루 사이로 빨간 날이다. 어딜 가든 계절의 온화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요즘, 나들이가 수월한 휴일이 반가웠다. 가까운 산을 오를까, 공원에 텐트를 칠까. 공휴일 오전. 행복한 궁리를 하고 있는데 큰 아이 휴대폰이 울린다.
"응, 알았어. 거기로 갈게."
친구와 짧고 굵은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은 아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나갈 태세다. 친구들과 근처 성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서너 명이 모이는데 각자 용돈 만원 씩 챙겨 와서 맵기로 유명한 떡볶이를 함께 먹는단다. 만남을 주도한 아이 친구 목소리가 어찌나 씩씩한지 휴대폰 너머 내게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큰 아이의 외출은 이틀 뒤 공휴일에도 이어졌다. 열두 살 아이가 친구들과 논다는 건 자연스럽고 반길 일이지만 한편으론 허전하기도 했다. 큰 아이를 빼고 남편과 나, 작은 아이는 놀거리를 챙겨 근처 공원에 텐트를 쳤다. 큰 아이는 친구들과 헤어지면 공원으로 불러야겠다 생각하고서.
오후의 금빛 햇살이 커다란 구름 사이로 번졌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공원 중앙 광장 너머로 텐트 자리를 보러 걸어가는데 멀리서 누가 부른다. "언니!" 큰 아이 친구 엄마였다.
"은호는 친구가 불러서 다른 데로 놀러 나갔어."
"응? 은호 저기서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 광장에서 큰 아이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공을 차느라 열중한 모습을 보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듯했다. 아는 척 않고 아이를 지나쳤다. 두세 시간 후.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 통화를 시도해도 아이는 묵묵부답. 여전히 노는 중인가 싶어 궁금하던 찰나. 공원 인도로 큰 아이와 친구들이 우르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공원 끝에 있는 놀이터로 가는 모양이었다.
몇 시간 만에 내 눈앞에 나타난 아이가 반가워 "은호야, 은호야!" 목청껏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이는 내 목소리도, 내 모습도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한 번 부르면 들릴만한 위치에 나와 아빠, 동생이 나란히 서 있었음에도 말이다.
곁에 있던 남편의 2차 시도. 공원이울릴 만큼 큰 소리로 아이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시선은 자기 곁의 친구들에게만 향해있고 무슨 대화를 하는지 낄낄대며 웃는 표정의 아이.
아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친구에게만 팔려있는 정신이여. 외출 후 전화 한 번 안 받고 몇 번을 외쳐도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던 아이가 순간 야속했다. 다른 아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과 내가 몇 번 더 큰 소리를 내지르자 그때서야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언제부터였을까. 부모에게만 머물던 시선이 또래 친구에게로 옮겨진 때가. 나 역시 큰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땐 친구가 제일 우선순위였다. 그러니 엄마도 나와 비슷한 심정을 느꼈을까. 엄마만 찾던 아이가 친구와 시간 보내는 걸 즐기는 아이로 바뀌어가는 모습에 이상하고 먹먹한 기분이 들었을까.
최근 어릴 적 친구와 연락을 했다. 열한 살,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났으니 무려 삼십 년째 친구다. 사실 친구의 얼굴을 본 지는 십오 년도 넘었다. 그녀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고 일 년에 두어 번 카톡을 주고받는게 우리가 소통하는 전부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안부를 전할 때면 어제 본 것처럼 어색함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너와의 기억은 다 따뜻하고 솔직하고 소중해.
그날도 오랜만에 연락했는데 친구가 대화 중에 이런 문장을 카톡에 올렸다. 나와의 기억을 따뜻하고 솔직하고 소중하다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준 친구가 멋졌다. 뾰족한 곳 없이 둥글려진, 친구의 뭉툭한 말에 아련해졌다. 오랜 기억의 뭉치를 삼십 년의 시간이 깎고 다듬어 딱 한 문장으로 남긴 듯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매일같이 함께 보낸 친구였다. 편한 사이니 말도 가리지 않았고 어떤 표정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오해가 쌓이기도, 서로 토라지기도 했는데. 이제는 선명한 기억보다 지워진 기억이 더 많다.
내게 유년의 기억이란밤하늘의 별 같다. 이제는 정확한 형체가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작은 빛 같다. 그러나 언제나 제자리에 있는 빛. 영원한 별이다. 친구의 문장 안에서 그때, 그 시절이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에게서 친구에게로. 시선이 바뀐 아이도 사실 새로운 눈을 뜬 것임을 알았다. 우정이란 게 얼마나 좋은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것일 테다.아이의 유년 시절도 진실하고 좋은친구와 함께이기를. 먼 훗날 유년의 기억을 별처럼 품고 사는 어른이 되기를. 따뜻하고 솔직하고 소중한 기억들로아이의 밤하늘이 총총 빛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