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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Jun 01. 2024

전봇대 십자가

전봇대 십자가


휴일 모처럼 설거지를 한답시고

막 고무장갑을 끼려는 찰나

씽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

밥이며 고춧가루 양념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다.


어휴, 물 좀 담아서 불려놓지

왜 매번 같은 소리를 반복해야 하나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물을 세게 틀어 놓은 다음

고무장갑을 애꿎은 수채통에 팽개치고 만다.


오늘도 내 자비의 그릇은 그렇게 깨졌다

한번 맘 먹고 도와주려는 날마다 매번 이렇다


거기다 순서 없는 냉장고 정리에

필요한 물건을 보물찾기 해야 하는 데까지 미치자

분노가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아내는 간밤에 손님 치르느라 피곤했는지

아직 저 멀리 꿈속에 있고

 홀로 서성이다 베란다에 나왔는데,

밤새 내린 비로 논에 물이 가득 찬 것이

무슨 저수지 같이 황홀하다.


어제만 해도 갈라터질 듯 메마른 논이

오리배를 띄워도 될 만큼 출렁이고

그 위로 전봇대 몇 개 줄지어서

물 속에 거꾸로 십자가처럼 박혀있다.


가물어도 논은 하늘을 미워하지 않나니

너의 마음이 성기면 이슬을 담아 큰 못을 이루리라.


못 위로 청둥오리 한 마리 지나가자

수면 흙탕물이 가라앉아 사방이 적요하다.


다시 씽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는데

그 사이 밥풀이며 고춧가루가 물에 적당히 부풀려

새벽 성전처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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