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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져니박 Sep 18. 2023

왜 이 일을 하는가

어느 INFP의 이야기

왜 이 일을 하는가


한자어 외래어 하나 없이 순수 우리말로만 이루어진 문장이다. 발음도 쉽고. 그런데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질문은 여러 가지 대답을 포용할 수 있다.


'이 일을 꼭 해야 하는 이유'처럼 교조적이지도, '일을 잘하기 위한 방법론', '일잘러 치트키'처럼 실용적이지도 않고 상대에게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질문이다.


아무리 햇볕이 강렬하고 태풍이 몰아쳐도, 잠깐 동요는 하겠지만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함부로 그 속을 알기 어려운 깊고 넓은 바다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 일. 을. 하. 는. 가 이 일곱 글자를 써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백색의 워드 프로세서 빈 화면을 클릭하고,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 자음과 모음을 우다다 때려 박기보다는 성기면서도 보드라운 화선지 위에, 적당히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한 획 한 획 써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제시어


몇 주 전, 온라인 격주 글쓰기 모임에 들어갔다.


자기 일도 삶도 사랑하고, 몰랐던 것을 새로 알아가고, 또 함께 나누는 데 진심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글을 쓰겠다고 모인 후 첫 제시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다. 마음에 든다.


그러나 나는 지금 18일 23:59 제출 마감 두 시간을 남긴 채, 시큼한 아메리카노를 들이켜고 있다. 깜빡이는 커서를 응시하면서, 며칠 동안 머릿속을 굴러다니던 시나리오들을 하나둘 꺼내어 본다. 아니 마음에 든다며...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충분히 시간이 있었는데.


뭔가 잘하고 싶은 일일수록, 머릿속에서 시나리오 a, b, c, a' 이렇게 찢었다 붙였다 하다가 데드라인에 맞춰서 실행에 옮기는 나란 인간. MBTI가 유사과학이라 하지만, 딴 건 모르겠고 나는 정말 N이고 정말 P다.


회사나 기고 일이면 이렇게까지 몰아치지 않는다. 미리미리 마일스톤을 정해놓고 지라와 구글 태스크와 캘린더 등 온갖 장치를 걸어놓는다. 자발적인, 혼자서 하는 일일 수록 어째 이렇게 몰아치는 경향이 더 심하다.


아니다, 질문이 문제다.


'왜 이 일을 하는가' 바다처럼 깊고 넓은 질문 아니던가. 쉽게 답할 수 없고, 당연히 쉽게 쓰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마치 내가 강원도 강릉의 포해변에 가서, 모래사장에 얼쩡거린 채 500ml 페트병에 바닷물 조금 뜬 것으로 '바다는 이거야'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 이 일을 하냐면...


그래도 직장을 구할 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누군가의 고민상담을 할 때 "당신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답변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아무 답변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나는 생각이 풍부한 사람인데.


물론 그전에 내가 묻는 말에 답을 안 해서 침묵이 흐르거나 회피하면 함께 있는 상대와 대화의 흐름이 끊긴다.


그거는 N이고 F인 나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다.


이렇게 저렇게 '왜 이 일을 하는가'란 질문에 내놓았던 답변들 중 가장 빈도가 높았던 것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질문을 넘어서는  추상적인 답변이다.


그래도 500ml 페트병에 담긴 바닷물이 무슨 색인지, 얼마나 짠 지 정도는 보여줄 수 있다. 딱 드는 생각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서',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라는 말은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돈을 많이 못 벌고 있나 보다.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태풍이 와서 잠깐 뒤집어졌던 적도 있어도 나의 바다는 거의 대부분 그런 색깔과 농도를 유지했다.


재미가 없는 것까지는 참겠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좀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좀 더 나은 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좀 더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일을 발견할 때,


그때 나는 이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더라.



질문이 곧 답이다.


저번 달, 한 모임에서 알게 된 친구가 몇 번을 부탁하여 커피챗을 한 적이 있다. 내 비록 학부 졸업하자마자 일 시작했으니, 총 일한 경력은 대리급 이상의 중니어라지만, 현재 PO(제품 관리자)라는 직무만 따지면 주니어라고 사양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렇기에 더욱 커리어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했던 친구였다.


어느 화요일 밤 10시에 화상회의로 만나기 전, 미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적어주면 나도 조금 생각해 보겠다 했었다. 얼마 뒤 점심시간에 카카오톡으로 몇십 줄의 답변이 왔다. 


무슨 전공을 했고, 몇 년도 몇 월에 무슨 일을 했고, 관심 있는  직무는 무엇이고, 인턴 기간에 무슨 프로젝트를 했고, 무슨 자격증을 따서 준비를 했고...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 친구가 쓴 글을 보고, 또 읽는 것도 들은 뒤, 해왔던 일 하나하나 되물어봤다.


인턴인데 짧은 기간 많은 것을 이뤘네요, 대단해요.
그런데 숫자와 결과 말고, 왜 이 일을 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요?


물론 체험형 인턴에게 얼마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정보와 권한이 있었겠냐만은. 최소한 주어진 이 일을 이렇게 해나가야겠다,라고 왜 생각했었는지 이야기해 주겠냐고.


몇 번 침묵과 대화가 오간 후, 그 친구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필요한 답변이었다고, 고맙다고 답변이 왔다.


'왜 이 일을 하는가' 질문이 그 친구에게 필요했던 답이었다.


끝.


져니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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