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2남 1녀 중 장남이시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할 때 홀어머니의 장남이라는 현실이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겪는 상황은 달랐다.
홀어머니인 할머니는 아빠를 신랑이자, 애인 이자, 아들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고
엄마는 그냥 본인의 귀한 아들을 뺐어간 여자일 뿐이었다.
할머니 입장에선 아이를 낳고 살림을 살아주는 여자가 들어왔다는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 초기를 제외하고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에 엄마의 결혼생활 대부분은
할머니와 함께 였다. 내 기억으로도 내 인생에 할머니가 없었던 적은 없다.
어릴 때부터 종알종알 말을 잘하던 나는 할머니를 만나면 모든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나의 의지도 있었지만 할머니의 유도신문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 쉴 때 머했노? 아빠랑 놀러 갔나? 머 사먹었노?
엄마가 머라드노? 이건 새옷이가? 어디 가서 샀노? " 등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캐내듯
어린 나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어릴 땐 몰랐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이 이야기 뒤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캐물은 뒤 엄마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셨던 것 같다.
[ 너희끼리 외식을 했다는 둥, 놀러 가니 좋았냐 둥, 새로운 살림살이는 무슨 돈으로 샀냐 ]등
모든 이야기를 추궁하셨다.
(아빠가 힘들게 벌어온 돈을 막 쓴다는 이야기였다. )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가 오실 때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폭풍 잔소리가 지나가고 나면 아빠와의 다툼이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한 번씩 다녀가실 때도 집은 난리가 났었는데...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나날이었다.
부지런한 할머니는 새벽 5시 이전에 하루를 시작하셨다.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를 돌리고 부엌을 정리했다. 부엌을 정리하는 이유는 어서 일어나라는
엄마를 향한 소리였던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빠를 위해 밥이 남아있더라도 늘 냄비에 새 밥을 해서 아빠를 줘야 했고
찌개가 있어도 국은 꼭 있어야 하는 아빠였기에 매 식사 때마다 국을 새로 끓여야 했다.
모든 취향은 아빠에게 맞춰서 식탁이 차려져야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의 안주인은 할머니 셨던 것 같다.
부엌살림은 모두 할머니 마음대로였다. 엄마가 꺼내기 쉽게 본인의 스타일대로 정리를 해 놓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머니 스타일로 다 바꿔 놓으셨다.
양념통 정리도 할머니 스타일로
수건을 개어 정리하는 것도 할머니 스타일로
[ 자신의 살림에 손을 대는 엄마에게 경고를 하는 듯했다. 아들의 집이기에 할머니가 대빵이라고
생각하셨고 그렇게 행동하셨다. ]
어딘가에 출근을 하지 않는 할머니 셨기에 집안 살림을 해주셨지만 -엄마는 맞벌이셨다-
살림에서도 아빠도 엄마의 차별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야기하자면
빨래는 아빠 것은 개어 서랍장에 놓아주셨지만
엄마 빨래는 개어서 그냥 방 위에 올려놓는 게 다였다.
아빠는 늘 새롭고 따뜻한 음식이 1번 이었다면 엄마는 그다음 순위였다.
알게 모르게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아빠와는 다 달랐다.
장남에 시집와서 딸 만 둘낳은 엄마이기에
할머니의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기억한다. 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시던 말
"니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니가 아들이었음 얼마나 좋았겠노.."
어렸을 때 수없이 듣던 말이다.
내 기억에 이렇게 많은 말을 들었는데
엄마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들으셨을까...
어느 정도 크고 나서부터는 엄마가 나에게 늘 하던 말이 있었다.
" 니는 절대로 장남한테 시집 안 보낼 거다. 시부모님 모시고 사는 집에 절대로 시집갈 생각 하지 말아라 "
어릴 땐 이게 뭔 말인가 싶었지만
할머니랑 같이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부터는
나도 다집 했던 것 같다.
" 절대로 장남한테 시집 안 간다.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 난 헤어질 거다. " 이렇게 말이다
현실은 어떨까....
엄마 왈
" 장남한테 시집 안 보낸다 했더니 외동에 종손한테 시집을 가고 난리고... "
지금 시대는 예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쉽지않은 자리이기에
시집가기 전날 걱정을 많이 하던 엄마가 생각 난다.
홀어머니 장남한테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했던 엄마였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