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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Jun 22. 2021

서울대공원

2021년 4월 11일

예정에 없던 소풍이었다. 혈관에 알코올이 흐르는 상태에서 잠이 든 탓인지 이른 아침부터 눈이 뜨였다. 아무 일정이 없던 하루였기에, 다시 잠이 들 때까지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유튜브, 인터넷 기사, 인스타그램. 의미 없이 세 플랫폼을 연거푸 오갔다. 갑작스레 눈에 들어왔던 건 가고 싶었던 전시의 도록 디자인이었다. 그 순간에도 오늘 그 전시를 보러 가게 될 줄은 몰랐으나,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인터넷에 국립현대미술관을 검색해 일정을 확인했다. 전시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은 오늘까지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요즘 예약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다. 황급히 예약을 했다. 과천관은 도착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나는 당장 10시 시간대의 예약만 건질 수 있었다. 그때가 9시 40분이었다. 오후는 전부 매진이었다. 황급히 씻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얼마나 볼 수 있으려나. 한 시간은 채울 수 있으려나. 휴대폰 카메라로 디테일은 다 모셔둔 뒤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에게 시간을 쏟을 심산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지하철 안에서 오후 2시 시간대의 취소 인원 자리를 주웠다.



예정에 없던 소풍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검색해보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대공원 안에 위치해 있었고, 지하철역에서 내려 20분가량을 걸어야 했다. 붕 떠버린 시간을 핑계 삼아 여유롭게 걷기로 마음먹고 도착했다.



나는 서울대공원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지도로 보이는 녹지 면적은 대충 서울숲쯤을 연상케 했으나(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광활한 주차장 크기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역 입구로 나가기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왁자지껄함에 '대공원'이라는 이름을 다시 되짚었다. 아, 사람 많을 수도 있겠다. 여기 서울대공원이구나.



하필 일요일, 하필 4월 초 푸른 날씨. 2년간 코로나로 몸살 앓던 도시를 전전긍긍하느라 쉽게 마주치기 힘들었던 인산인해를 마주했다. 억울했다. 나는 단지 올림픽 전시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없던 코로나도 생길 것 같은 풍경이었다. '전시관 오는 길' 중 하나였던 코끼리열차는 서울대공원을 횡단하는 셔틀이었고, 도보 30분 거리를 코끼리열차를 탄다면 5분 만에 갈 수도 있었지만, 1시간씩이나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누가 한국의 출생률 더러 위기라고 말했던가. 만약 나와 같이 이곳에 왔다면 인구감소는 딴 나라 사정임을 알 것이다. 빽빽이 움직이는 사람 중 70%는 아이와 함께 놀러 온 부모였다. 나머지 20%는 젊은 커플이었고 10%는 중년 단체 같았다. 그들의 행복이 KF94를 삐져나왔다. 아이들의 동심은 손에 든 풍선처럼 한껏 부풀어 올라있었고 거리 한편에서는 솜사탕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창한 봄 햇볕에 우는 아이 하나 없기에 부모들은 한없이 다정했다. 한손에 뻥튀기 아이스크림을 든 채 아이에게 줄 것인 양 바삐 걸어가는 남성과 만삭의 몸을 이끌고 온 여성의 이마엔 기쁜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서울대공원의 메인 컨텐츠는 동물원이다. 미술관이 가는 길에도 양이 보였다. 사실 동물원이란 공간 자체가 얼마나 구시대적 문명의 산물인가. 하지만 동물원에 상당히 비판적인 나의 소신이더라도 방문객들 행복의 총량 앞에선 아무런 힘이 없었다. 쾌청한 공기와 달리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여전히 동물원은 없어져야 마땅함은 변함없지만, 누군가에겐 꿈과 행복으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드문드문 지적장애인 자식의 양손을 꼭 잡고 놀러 온 부모도 꽤 보였다. 신체적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나, 정신적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나 이곳 자체가 동심인 것이다. 나까지 통째로 옛날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오히려 자연스레 어울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결혼이란 사회 관습과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동물원이 한데 어우러지며, 2000년대 초반으로 시간이 머물러있는 듯한 묘한 멜랑콜리를 우려냈다. 그렇게 00년대 인파를 비집고 걸어가 나는 88올림픽 전시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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