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생 Nov 12. 2019

여행의 비밀

열두 번째 편지


'너 한국이야?' 간만에 연락 닿은 애들이 하나같이 묻는 말이었다. 이번 해 여름,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동창 하나도 악수를 청한 뒤 저 말을 건넸다. 항공사 다닐 때 올린 SNS 게시글마다 태그된 장소가 해외였던 게 첫 번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캐나다로 떠났던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내게 답하는 열두 번째 편지



12일 차 주제. '여행'





없는 사람처럼


사실 저 질문을 좋아했다. '여기 없는 사람'으로 내비치는 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히든카드를 쥔 셈이다. 외국에 자주 나가는 건 여러모로 핑계 대기 좋았으니까.





다시 시작하려고


퇴사 후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토론토 한국 회사에서 일할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캐나다 영상 회사 면접을 보고 다녔다. 졸업 후 전공과 무관한 일을 했고, 포트폴리오도 급조했으니 연고 없는 곳에서 잘 될 리 없었지만. 머무는 내내 아이패드를 끼고 잡 페어를 쏘다녔고, 먼저 연락해 방문한 회사에서 면접을 봤다. 피부색 뒤섞인 지원자들과 정체 모를 컴퓨터 시험도 쳐봤다.


끝끝내 한국 회사는 가지 않았다. 내 목적은 나를 잘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데 있었어서.





밀회


여행지에서 또 다른 나와 밀회했다. 홀로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는 나 자신이 용기 있고, 대담하다 느꼈다. 평생 우려먹을 자랑거리 하나도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부터 금문교를 횡단해 소살리토 섬까지 라이딩한 일이다. 한국에선 입을 수 없는 옷을 입고, 한국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다니면 희열을 느꼈다. 그땐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스카이다이빙도 선뜻 예약했을 정도. (우천으로 취소됐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도전하길 머뭇하지 않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나'라는 데서 오는 은밀한 쾌감을 즐겼다.



도피


현실에서 좋아하는 나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잘 나가다도 위축되고 가라앉아버렸다. 그러면 다시 여행지로 눈을 돌렸다. 눈앞에 문제를 무마시키는 데 여행만 한 만병통치약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어디론가 떠났다.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내 모습으로부터 떠나 외면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이상했던 날


오래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한 비디오 몇 개를 찾아보았다. 어둑한 밤,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 옆을 혼자 걷는 영상을 그리도 많이 찍었다. 비디오 중 하나에 '복받친 날'이라고 쓰여있었다. 그걸 보니 기억이 조금 되살아났다. 갈 때마다 찾던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빨리 지던 날이었다. 그날은 제정신이 좀 박혔었는지 서둘러 숙소로 뛰며 걸으며 심장이 쿵쿵 쿵쿵 뛰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 순간 그곳에는 그 장소와 나만 있었다. 내 몸의 무게가, 가쁜 숨이, 눈앞의 광경과 그 속에 있는 나, 이 순간이 감격스러웠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 날이었다. 그때 왜 그렇게 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행의 비밀


결론적으로 10여 년 전부터 다녔던 여행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비밀스런 여행도 끝이 났다.


이리저리 빙빙 도는 동안, 나는 끝없이 장소를 바꾸고 내 곁의 사람을 바꾸려 했었다. 그리고 캐나다를 마지막으로, 결코 환경이 나를 바꾸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국 같은 곳에 있어도 내 마음이 지옥이면 그곳은 지옥이었다. 현실에서 도망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던 나는 어디에도 있었다.


도피성 짙은 지난 여행은 내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헛된 희망이 깨진 덕분에 지금 나는 새로운 여행길에 있다. 이번엔 어디로도 가지 않는 여행이다.





나를 찾는 여행 중,

내일은 열세 번째 편지를 씁니다.


https://brunch.co.kr/@chograss/174


매거진의 이전글 과정에 머무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