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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생 Nov 15. 2019

아픔이 흐른다. 걸어도 걸어도.

시간과 아픔이 같이 걷는다


우리가 영화에 울고 웃고 치유될 수 있는 이유는 '감정 이입'에 있다. 그래서 역으로 아픈 영화도 있다.


내게 답하는 열다섯 번째 편지


15일 차 주제. '영화'



영화 속 이야기와 캐릭터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또 프레임 속 내 세계를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기도, '영화는 영혼에 놓는 주사'란 표현처럼 다시금 일어설 힘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까.


또 그 반대이지 않을까. 나를 이입해서 불편한 영화, 오늘 그중 하나를 나누려 한다.



<걸어도 걸어도, 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픈 영화가 있다.


가부장적 문화를 이어가는 가족. 평생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형 그늘에서 살아온 주인공 료타. 상대방을 면전에서 비난하고 무시하는 걸 서슴지 않는 아버지. 남편의 외도까지 품고 사는 어머니. 각자의 살이 에일 듯한 상처를 뒤로 웃고, 외면하고, 거짓말하며 가족 형태를 유지해나간다. 



아픔이 흐른다. 걸어도 걸어도.


남편과 사별해 아들 하나 있는 여자와 결혼한 료타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 수치스럽다. 바다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구조하다 떠난 형의 죽음은 결코 흐려지지 않아 엄마 마음을 때린다. 10년째 맞는 추모식에도 죽은 아들이 구한 그 남자를 부른다. 인제 그만 부르는 게 어떠냐는 료타의 말에,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도 오게 만들 거야.”는 대답이 돌아온다.


세월이 무색한 상처 사이로 이들 가족은 계속 걷는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묘지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걷고, 아픔도 같이 걷는다.




노란 나비


깊은 밤, 집안에 날아 들어온 노란 나비를 보자 어머니는 묘지에서 따라온 죽은 아들이라며, 종종걸음으로 나비를 쫓는다. 료타의 의붓아들 쇼헤이는 노란 나비를 보고 죽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바다


아버지, 료타, 쇼헤이 세 세대는 영화 끝자락에서 형이 죽은 바다로 나선다. 바다에는 가지 말라는 할머니의 애타는 목소리에 쇼헤이는 '네' 말만 해둔다. 하얀 바닷가 모래 위 이 세 명은 누가 봐도 보기 좋은 가족이다. 언젠가 셋이 축구를 보러 가자고, 료타와 아버지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한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료타의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가 뒤따라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와 아들은 끝내 경기를 보지 못했다.



상처는 우리 삶 곳곳에서 노란 나비처럼 나타나,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이를 향한 반응은 모두가 다르다. 영화 속 료타의 어머니는 바다를 피하고, 아버지는 바다로 향하듯. 걸어도 걸어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료타와 아버지 사이처럼, 시간에 업혀 흘러가는 상처도 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마지막처럼, 사람은 끝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이러나저러나 영화가 고맙다.

*브런치북 [영화 뒤에 숨어서]




나를 찾는 여행 중,

내일은 열여섯 번째 편지를 씁니다.


https://brunch.co.kr/@chograss/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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