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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나물 Jan 20. 2022

이웃끼리 서로 잘 이해하라고요?

층간소음 가해자를 감싸는 사회

from pixabay

 어제도 그들에게는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였다. 그들은 퇴근 후 우리 집 천장을 운동장 삼아 괴성을 지르며 2시간여를 신나게 뛰어놀았다. 글을 쓰는 지금도 엄청난 발망치를 찍으며 온 집을 헤집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또가 당첨되어 그들의 윗집을 사서 똑같이 뛰는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어제는 다른 날과 다르게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여느 층간소음 피해자들과 같이 층간소음 카페를 가입했고, 조언을 구했다.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도 들어갔다. 거기서 내가 알게 된 점은 우리 사회는 '피해자'인 우리보다 '가해자'인 그들을 더 보호해준다는 점이었다.

 핸드폰으로 층간소음을 녹음하려고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상당량의 소음은 거의 녹음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어제 그들이 낸 소리는 나의 핸드폰에 여전히 남아있다. 소리를 굳이 크게 하지 않아도 선명히 들릴만큼. 그래서 이 파일을 한번 올려보고 의견을 들어보고자 하니, 그러한 파일들은 공유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의 존엄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부분의 법이 가해자에게 너그러운 편이지만, 층간소음에 대해서는 정말 너그럽다 못해 묵인하는 듯했다. 피해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방법은 관리실에 끊임없이 중재를 요청하고, 천장을 그저 치는 것일 뿐. 

 또 하나 우리 사회가 피해자인 나에게 주는 가장 슬픈 압박감은 내가 예민할 뿐이라는 차가운 시선이다. 층간소음 카페나 채팅방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당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그에 반해 가해자들이 하는 말은 가지각색이다. 애들은 다 뛰고 싶어 하는데 좀 참아주세요라느니 너도 애 생기면 시끄럽게 살 거라느니는 그래도 양반이다. 심지어 자기 집에서 애가 뛰면 아랫집이 항의해서 부모님 집에 오는 수밖에 없다거나 이 전집에서는 괜찮았는데 왜 당신만 못 참고 까탈스럽게 구냐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말하는 너저분한 핑계와 구차한 변명들은 가지각색이지만, 하나같은 결론은 피해자가 문제라는 점이다.

 어제는 층간소음 채팅방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아랫집에서 자꾸 층간소음으로 항의를 해서 문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야간 돌아가며 근무하는 사람으로 베란다에 냉장고를 두었다고 했다. 모두가 발망치는 성인남녀 모두 유발 가능한 소음이고, 차가운 타일 위에서 모터가 돌면서 간헐적으로 소음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그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루시공 여부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반복적으로 자신의 집에는 애가 없으며 윗집에서 애기가 뛰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는데 그 소리가 아래로 흘러들어 가지 않았을까만을 반복했다. 그때 채팅방의 여러 명 들이 숙덕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가해자라고. 우리가 여태껏 들어왔던 그 모든 핑계와 일관적인 피해자인 척하는 태도를 우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층간소음 가해자들은 저렇다. 소음은 당연한 것이고 상대방이 어떻든지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태도이다. 본인의 생활 습관과 집에서는 전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애초에 말로 서로 해결이 되었다면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피해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로 이웃과 함께 잘 해결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그냥 좀 참으라고 한다. 

 나도 사회적 통념에 맞춰 지속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해왔다. 우선 기본적인 생활 소음인 청소기 돌리기, 귀가 후 바로 내는 발망치, 배수, 급수, 새벽 시간의 샤워소리 등에 대해서는 나는 기본적으로 항의하지 않는다. 그런 소리들은 기본적으로 공동 주택에 살고 있으므로 상호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애가 3살이 될 때까지도 참았었다. 겨우 이제 기고 서는 아이가 근육을 어떻게 조정하겠느냐는 배려여서였다. 그 오랜 배려가 이제는 당연한거라 여겼는지 윗집이 나의 배려에 대한 대답으로 돌려준 것은 애와 어른이 함께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애가 기분이 안 좋아서 자꾸 쿵쿵대는 걸까. 10분만 더 참으면 조용하지 않을까. 슬리퍼를 사다 줘 볼까. 나 혼자 그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배려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루 평균 3시간과 주말 평균 6시간의 쿵쾅임으로 말이다. 

  우리 윗집의 경우에는 관리실을 통한 주의나 남편의 문자에 항상 알겠다고만 대답한 뒤 10분 정도 조용히 해주는 것이 다이다. 도대체 뭘 알겠다는 걸까. 도대체 뭘 주의해준다는 걸까.  크리스마스에 조카까지 데려와서 신나게 8시간을 뛰어놀다가 집으로 보낼 정도이니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게 틀림없다. 결국 그들도 항의하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암묵적으로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내는 층간소음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윗집만 저렇게 생각하는걸까. 

 이웃끼리 서로 말로 잘 해결하라는 것은 상대가 고칠 의사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소음은 아주 주관적인 영역이기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당성과 피해규모에 대한 규정과 판례가 매우 모호하다. 하지만, 적어도 성인의 발 망치 소음과 고성방가는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있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소음과 진동은 그 폭력성이 가볍지 않다는 점을 다른 사람들도 공감해줬으면 한다. 오죽하면 칼로 사람을 찌르겠는가. 오늘은 핸드폰에 데시벨 측정기를 다운로드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동영상을 촬영해볼 요량이다. 어찌 되었건 내게 주어진 것은 나의 피해 사실을 꾸준히 기록하는 것뿐이기에. 나도 그들을 찌르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하루하루 무엇인가 발버둥쳐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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