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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지기 Nov 12. 2020

[허니레터] 괜찮아, 방황해도.

4. 열두 발자국 / 정재승 / 어크로스

우리는 평소 길을 잃어본 경험이 별로 없죠. 길을 잃어본 순간,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지도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p58)     


가을과 겨울이 서로 버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루 중에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는 것 같지 뭐야. 가을이 가는 게 아쉬워서 자꾸만 어디를 가고 싶어 지네. 엄마는 며칠 전 네가 학교에 갔을 때 혼자서 대성리 역에 다녀왔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기차를 타고 한 번도 간 적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었단다. 왜 하필 '대성리' 역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충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기차에서 내리자 이름도 익숙한 '대성리'역이 나왔어. 역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역 이름과는 달리 낯선 풍경이 펼쳐 치더라. 인도도 없고 눈에 띄는 건물도 없고 차는 어찌나 씽씽 달리던지 그만 겁이 나지 뭐야.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어. 조금 두렵기도 했고. 뒤로 돌아가면 멋진 곳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눈 앞에 보이는 '낯섦'에 압도돼 그만 생각이 정지되고 말았단다. 길을 잃을까 염려는 안 했지만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하는 책망의 기분이 들었지. 어쨌든 대성리에 온 목표는 달성해야겠기에 길 건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만 한 잔 마시고 왔어. 대성리는 다 같이 놀러 갈 때나 좋지 혼자 가기엔 별로더라. 어찌 됐든 내 안에 있는 세상의 지도 중 한 곳에 어설프게나마 발자국을 찍게 됐단다. 대성리. 인도가 없음. 재미는 못 느끼고 두려움을 느낌. 콩. (찐하게 '쾅' 찍으려면 대성리 곳곳을 세심하게 둘러봤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했어) 엄마는 때때로 모험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 하지만 일정 거리에서 벗어나면 두려워지는 내면의 마음 때문에 늘 모험은 '충동'과 어울리지 않게 이렇게 어설프게 끝나고 만단다. 


엄마는 언젠가 뇌 과학자인 정재승 박사님이 쓴 <열두 발자국>이라는 책을 읽었어. 박사님이 그러는데 길을 잃어 본 순간 세상에 대한 지도를 얻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법을 배우라지 뭐야. 엄마는 새로운 곳에 가거나 길을 잃으면 잔뜩 겁을 집어먹는데 세상에나, 길을 잃어야 세상에 대한 지도를 얻을 수 있다잖아. 엄마가 가진 지도는 왜 이렇게 희미하고 단순하고 재미가 없나 했더니 그동안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 길을 잃을까 봐 무서워서,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봐 두려워서,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봐 염려돼서, 준비가 덜 돼서 등등의 이유로. 모험에 대한 충동이 강렬하거나 적극적이었다면 엄마가 가진 지도는 좀 더 볼 게 많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낙심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을게. 지도는 지금부터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 사실 엄마는 너를 키우면서 예전보다 용감해졌거든. 그래, 용감해지고 있어. 이전에 해보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데 시간과 정성, 이 한 몸을 들일 용기가 충분히 있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세상에 대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내가 그린 그 지도 위에서 뭘 하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내가 그린 그 지도 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지도를 주지 않아요. (p58~59)     



길을 잃어 보려면 새로운 곳을 자꾸 걸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많이 많이 가봐야지. 계속 같은 길만 가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길을 잃고 방황해보라고 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네. 이왕이면 쉽고 빠르게 길을 찾으면 좋지. 그런데, 네가 10대 때 길을 쉽고 빠르게 찾는다는 것은 누가 옆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알려준다는 거 아닐까? 아동기, 청소년기 때는 특히 더 그렇겠지? 엄마 역시 네가 스스로 지도를 만들게 놔두지 못하고 색연필을 들어 너의 지도에 멋대로 기호를 그려 넣었던 것 같아. 네가 그렸다면 시간은 걸렸을지라도 더욱 다채로운 모양과 색깔을 지녔을 텐데 말이야. 세상이라는 다양한 지형 위에 너만의 기호와 색채를 그려 넣을 수 있도록 네가 쥐고 있는 색연필을 뺏지 않을게. 무엇을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할지 모를 땐 적극적으로 방황하렴. 방황하는 네 모습이 걱정된다는 핑계로 너의 지도를 마음대로 편집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않아야겠다. 곁에서 너의 길 찾기를 지켜보며 말없이, 때로는 말로,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저 사람이 저걸 믿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과 미적 취향에 너그러워야 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재고하고 늘 회의하고 의심해보는 사람, 그래서 결국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p53)     



겸손함과 결단력을 가지고 길을 걸어간다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용기 있게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 길을 가다 만난 누군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세상에는 자신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으니까. 물론 과학도 발달했으니까 기기의 도움도 받아야지. 융통성도 있어야 해. 그러면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거야. 조금 오래 걸리고 어렵게 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가는 길이 진짜 너의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마흔을 넘기고 있는 엄마는 지금 중년의 길 찾기를 하고 있단다. 어떻게 어떤 중년을 보내고 어떤 노년을 맞이하게 될지 몰라서 걱정이 되기도 해. 하지만 열린 태도로 적극적인 방황을 마다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중년의 길을 걷다 보면 서툴게나마 나만의 지도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설레기도 해. 백지 같기도 하고 미로 같기도 한 인생을 우리 함께 멋지게 그려나갔으면 좋겠다. 초록을 터뜨릴 10대의 너도, 아직 터뜨릴 게 없어 방황하고 있는 40대의 나도. 


허니야, 

사랑한다, 어제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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