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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심 Jan 27. 2021

프롤로그 I. 스물여덟

그 날은 정말이지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하루종일 내리던 폭설 때문에 퇴근길은 어느 때보다도 꽉 막혀있었고 녹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펑펑 내리는 눈 속에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만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맨해튼에서 뉴저지로 이어지는 링컨터널 입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 나오지도 못한 채 차 속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혼자 바쁘게 움직이는 윈도우 와이퍼를 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출근길에 전화하시던 엄마가, 웬일로 퇴근길에 전화가 오셨다. 


'안 좋은 일인가..?'

순간 생각하다가 별일 아니겠지 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쁜 소식이었다. 엄마는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담담하게 전화를 끊었지만 미안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얼마 전 통화 중에 힘겹게 숨을 내쉬며, 


"보고 싶다, 보.. 고.. 싶.. 다"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다 내 이름을 되뇌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며칠 뒤면 가실 것을 아셨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강인하셨던 할머니가 정말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게 보고 싶다고 그냥 한국에 지금 오면 안 되냐고 하셨던 것은 처음이었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이직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휴가 내기가 어려우니 조금만 기다리시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는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가 않아서 어느새 내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됐고 터널 속 불빛이 번져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이는 채로, 그렇게 나는 천천히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6.25 시절 월남을 하셨다.


피난 오시면서 총 맞은 자국이라며 다리에 남은 큰 흉을 보여주셨던 것으로 짐작건대 할머니는 어렸을 때에도 강인하고 씩씩하셨던 것 같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맥없이 주저앉아버렸을 텐데, 할머니는 총을 맞고도 먼 길을 걷고 또 걸으셔서 부산에 터를 잡으셨다. 


할머니는 전쟁통 속에서도 맨손으로 시작해 많은 것을 일구셨다. 

흔히들 말하는 잘 나가는 사장님이자 워킹맘... 그게 우리 할머니였다.


억척스럽게 나염 장사를 하신 할머니는 엄마의 다섯 남매를 모두 부족함 없이 키우셨고, 그의 자식들인 손주들 유학비까지 대실만큼 풍족한 살림을 꾸리셨다.


명절이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많은 음식을 하셨는데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이북식 순대와 녹말 국수는 그 어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도 맛있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사랑하는 엄마의 가장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자, 자식들에게 커다란 그늘을 드리워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셨다. 




하지만 얄궂게도 할머니가 아들들에게 장사를 넘긴 지 몇 년 안되어,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게 되셨다. 암은 이미 조금 진행이 되어있는 상태였던 데다가 부위도 좋지 않아 수술은 해보지도 못한 채 색전술로 생명을 연장해 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입원 치료와 통원치료를 번갈아 받으시게 됐다. 


그렇게 강하고 큰 나무 같았던 할머니도 병 앞에서는 약해지셨고, 한없이 야위셨다. 


대학시절부터 쭉 미국에서 지내던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한 채,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미국에서 지내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은 내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도시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함께, 대학교와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혼자서 미국 뉴욕에서 자취를 하며, 제2의 집이라 여겼는데 처음으로 가족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그 해 겨울,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족이 그리고 가족이 있는 서울이 그리웠고 

트위드 재킷과 미드힐 펌프스를 즐겨 신으셨던 나의 멋쟁이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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