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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n 30. 2020

‘나’가 없는 ‘must’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극성 팀장이었다. 출판 관련 컨퍼런스, 각종 행사나 교육을 찾아 후배들에게 같이 가자고 조르거나 내가 못가면 기어코 후배들의 등을 떠밀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는 일의 성격상 정적인 성격의 편집자들이 많은데다, 집중해서 원고를 편집하고 있는데 자꾸 나갔다가 오라는 선배가 싫었겠다 싶다. 그런데 ‘바깥 공부’를 하고 온 후배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별로 들을 게 없던데요. 맨날 하는 얘기가 거기서 거기예요.”

“저는 000이 좋더라고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처음에는 내가 권유한 컨퍼런스나 교육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후배들에게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별로 들을 게 없다.’는 말이 뭘 다 알아서, 또는 그것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저 ‘나는 관심이 없다.’라는 속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 마음이 읽히자 서운한 마음은커녕, 다음부터는 굳이 밖으로 등을 떠밀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좋았다고 말하는 후배들은 컨퍼런스의 연사들이 전해준 새로운 정보나 지식에 반응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자기 안에 이미 꿈틀대던 작은 관심이 만들어낸 긍정성을 보인 것뿐이었다.

‘관심’은 어떤 대상에 마음이 향해 있을 때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이나 감정이다. 그 마음이 없으면 어떤 대상 자체를 무턱대고 부정하거나 이유 없이 비난하기도 하고, 또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 일들이 대단히 긍정적인 결과물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전에 독일의 한 기관에서 운영하는 리터러시 프로그램에 대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다. 프로그램 이름은 일명 사커 리터러시(Soccer Literacy). 독서 경험이 많지 않거나 읽기를 어려워하는 소외 계층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축구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은 축구 경기를 열심히 뛰고 난 뒤, 교실에 모여 축구 기술, 축구 경기의 룰, 선수들의 히스토리를 읽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들에게 좋은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오직 축구를 잘하기 위해 읽을 뿐이었다. ‘읽기’ 자체가 아니라, ‘좋아하는 축구’가 목적이었다.

나는 이 방법을 학교 밖 친구들에게 국어(검정고시)를 가르칠 때 적용해 보았다. 친구들 중에는 읽는 것 자체를 거부하거나 다섯 줄만 넘어가도 읽기를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국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하루는 검정고시 문제풀이를 덮고, 좋아하는 것을 한 가지씩 말해보라고 했다. 축구, 농구, 게임, 프로레슬링 등 여느 10대들의 관심사들이 쏟아졌다. 나는 각자가 말한 관심사를 다룬 기사나 조금 전문적인 자료를 매주 준비해서 가지고 갔다. 수업의 주인공은 매주 바뀌었다.

“자, 오늘은 00이가 좋아하는 ‘00’에 대해 알아보자.”

아이들은 문제풀이 지문을 읽을 때보다 글 읽는 속도가 배 이상 빨라졌고, 이해력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집중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모르는 단어를 표시해서 물으면 아이들이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설명해주었다. 스포츠 룰을 설명할 때는 몸으로 직접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적극성은 처음이었다.) 다섯 줄 이상 읽지 못했던 아이는 적어도 끝까지 읽으려고 애를 썼다. 뭔가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수업은 성공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나였다. 자기 관심!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나 독서 전문가들은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한다. 그런 책들로 정리된 추천목록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목록들을 볼 때마다 많이 읽는 사람들이 그보다 덜 읽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이지 ‘안 읽는 사람’이나 ‘못 읽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남들에게 인정받은 자기 관심사를 남에게 강요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후배들에게 밀고나갔던 방식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나’가 없는 ‘must’가 너무 많다. ‘00을 꼭 읽어야 한다’, ‘그곳에서는 00을 꼭 먹어야 한다’, ‘00에 한번쯤 다녀와야 한다’ 등 어떤 것을 많이 향유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must’들. 그 기준을 따라가려다가 길을 잃는 사람들이 참 많다.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멈칫하고 맴돌다가 그만둔다.

‘읽기’는 ‘좋은 책’이 아니라 ‘자기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기 관심에서 읽게 된 글이나 책이 독서의 시작이자 바탕이 될 때 그것들 중에서 나만의 좋은 책이 나온다. 하루는 독서 전문가인 선배가 나에게 어떤 책의 제목을 말하며 읽었느냐고 물었다. 읽지 않았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 책을 아직도 안 읽었느냐, 너무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선배가 너무 깜짝 놀라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그 선배의 표정에서 드러난 걱정, 불안, 우려가 ‘읽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다. 그럴 리 없지만 나는 그 전문가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기를 속으로만 바랐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다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을 함부로 권유하지 않았다.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그 사람의 시작을 방해할까 싶어서다. 물론 독서도 포함된다.


책을 읽어서 고통이 사라진다면, 진짜 고통이 아닙니다.

책으로 위안을 주겠다는 건

인생의 고통을 얕잡아 본 것입니다. _샤를 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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