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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l 08. 2020

100쪽에 대하여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기 전에 그 책에 대한 무수한 정보들을 접한다. 그 책을 처음 만난 곳, 그 책을 소개해준 사람, 디자인, 제목과 카피, 크기와 두께, 저자의 명성, 출판사, 서점 매대의 위치, 온라인에 떠도는 갖가지 시각 정보, 누군가의 리뷰, 베스트셀러 순위, 사회적 이슈 등 책을 읽기 전에 접하는 정보의 양이 과거보다 대폭 늘었다. 이런 것들을 접하기 전에 책 속으로 곧장 들어갈 방법이 없지 않을까. 또 이런 정보들 덕분에 좋은 책을 만나고 읽을 수 있는 행운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책을 읽기 시작하고부터는 그 모든 사전정보들로부터 놓여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인상을 지우고 온전히 그 책을 만나기까지 약 100쪽을 읽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걸린다. 100쪽을 읽기 전까지는 수많은 사전정보, 평판, 내 안에서 굳어진 편견에서 잘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모두 이끌고 100쪽까지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책과 만나 환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그다음부터는 순수한 나만의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나와 그 책 둘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러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이면 그 책에 대한 모든 사전정보나 평판들이 모두 지워질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들이 하나둘 되살아 내가 만난 진짜들과 비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은 정말 그렇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나름대로 알게 된다. 내게 주어졌던 것들 중에 ‘가짜’가 가려지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 책을 고르는 안목이 조금씩 생긴다. 확률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 안목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을 알기 전까지 미리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사람의 겉모습, 얼굴 표정, 걸음걸이, 평판, 스펙 등 ‘진짜’를 알기 전에 접하는 사전정보들이다. 내가 직접 얻은 것이든, 누군가에 의해 얻게 된 것이든 어떤 대상을 제대로 알기 전에 접하는 사전정보는 의외로 영향력이 크다. 내가 직접 겪고 경험해서 그 사람을 알게 된 뒤에도, 몇 가지로 조합하여 마음속에 새겨졌던 과거의 느낌을 잘 버리지 못한다.

나는 성격이 좀 급한 편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빨리빨리 규정하는 버릇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쉽게 반하는 것도, 어떤 이에게 쉽게 실망하는 것도 급한 성격 탓이다. 좀 두고 보면 좋을 관계도 얼른얼른 정리하거나 규정지어야 마음이 편했다. 책을 읽기 전에 접하는 정보와 편견을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끌고 가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가령 A를 친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둘의 관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거나, B를 그저 지인으로만 생각했는데 몇 년이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 내게 열심히 길을 내다가 만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왜 A와 B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아니 보지 않았을까? 나는 내 안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이 있었기에 실제 그들의 행동과 말을 허투루 대했던 것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혹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보태졌을 것이다. 내 안에 쌓여 있는 정보로만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해진 관계의  노선을 따르느라 진짜 봐야 할 것을 자꾸 놓치고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서 어떤 시점에 이르거나 관계의 속살을 보이는 사건들이 생겼을 때야 그간 놓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쯤 되면 대세 관계가 많이 꼬여 있어 회복이 어렵다.

나는 여러 차례 아픈 경험을 하고 나서야 관계를 어설프게 규정하는 일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하지만 노력하는 것뿐이지 급한 성격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규정하거나 판단하고 싶은 마음의 끄트머리나 모서리를 잡고 애를 쓰는 것뿐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속도도 그렇지만 에너지를 한번에 몰아 쓰는 경향이 있다. 초반에 힘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정작 힘을 써야 할 때 쩔쩔 매거나, 에너지가 부족해서 순간 감정적이 되기도 한다. 그런 나의 성격을 아는 어머니는 내가 무거운 것을 옮기거나 꽉 잠긴 뚜껑 같은 것을 열 때 오만상을 찌푸리며 덤벼들 듯 힘을 쓰는 나를 보면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힘을 좀 빼. 그렇게 힘을 다 안 써도 돼.”

그러면서 딸의 힘을 아껴주기 위해 ‘머리’를 쓰신다. 바퀴 달린 의자나 헝겊을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슬슬 옮기거나, 뚜껑이 안 열리는 병은 잠시 상온에 두고 기다렸다 열었다. 그렇게 안 되는 잘 일에 힘을 세게 주기보다 우회하거나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하신다.

책의 진짜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며 읽는 것, 어떤 사람의 진짜를 볼 때까지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함부로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어떤 대상을 잘 모른 채 힘을 쓰지 않는 것은 현재 그 둘의 시간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들에 대해 내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었든,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든 상관없이 그 둘의 100쪽을 견디며 ‘지금’을 함께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을 잘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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