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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Sep 02. 2020

‘나’로 시작하는 책 읽기_비독자에 대한 오해들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해마다 독서율은 줄어드는데, 사람들이 읽는 양은 늘고 있다.”는 말은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글을 읽는 사람은 늘었다는 뜻이다. 책은 책꽂이나 전자책 목록에 있지만, 글은 책을 포함해 기사, SNS, 특정 사이트나 플랫폼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다못해 개인들이 주고받는 엄청난 양의 메시지와 이메일, 파일도 엄연한 글이다. 과거에는 글이 모이면 책으로 묶어내는 것을 최고의 지적 행위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 존재하는 모든 글을 책으로 냈다가는 세상이 온통 책으로 뒤덮일 지경이다. 그 글들은 책으로 묶어낼 필요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순조롭게 읽히고 있다. 글을 책으로 묶는 제일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에 둔다면, 모든 글이 책으로 나올 이유가 없다.


글을 모아 신문기사나 종이책으로 찍어내던 시대의 독서율과 다양한 형태의 읽기를 하고 있는 지금의 독서율은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르다. 다양한 형태의 읽기가 현존하는 이 시대에 ‘책’의 형태만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시대에 뒤떨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책의 수많은 장점은 일단 논외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기의 한 형태로 보지 않고, 읽기의 최고봉으로 여기거나 신성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책’에 좋을까? 책을 특별하고 엄숙한 것으로 구분하면 할수록 책은 세상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고, 어쩌면 미래에는 ‘책’의 형태가 비난이나 조롱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글이나 책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글을 읽는 사람’이 곧 ‘책을 읽는 사람’이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글을 읽는 사람’이  꼭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요즘 ‘비독자’ 또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조금 불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부정적이거나 안타까운,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책을 읽도록 해야 할) 계몽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누구의 시선인 건 뻔한 일이다. 책을 많이 읽는 일부의 사람들, 글이나 책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 독서 정책을 펴는 사람들 등.


나도 ‘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책 읽는 것이 재밌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다. 책모임도 한두 개씩 꾸준히 나간다. 책 만드는 일을 하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어쩌다 책도 쓰게 되었다. 출판이나 글쓰기 강의를 하고, 봉사도 ‘글’과 관련되어 있다. 전공도 그렇다.”

이런 이력으로 20년 넘게 살아온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쓰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책을 많이 읽거나 쓰는 사람에 대한 ‘환상’이 별로 없다. 아주 가까이에서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특별히 나은 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찾을 것 없고 나 자신만 봐도 알 수 있다. 책을 읽고 쓰는 행위의 거룩함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것을 좋아하고 찬양(?)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삶의 모습으로 연결되기란 어려우며, ‘실천’이나 ‘성찰’과는 거리가 있는 ‘지적 만족’이나 ‘가르치는 행위’로 그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나의 이력 대부분이 ‘책을 많이 읽고 쓰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13년 전에 우연히 시작한 봉사활동으로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봉사활동에서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지인들 중에서도 ‘읽고 쓰기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눈여겨보는 일이 많았다.

그 경험은 나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책 읽기는 독해력이 아니라, 경험 읽기와 관심 읽기에서 시작된다.”


가령 내가 만났던 학교 밖 친구들 중에는 폭력 등의 문제로 특정 장소에서 정해진 기간만큼 지내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글이나 책을 읽어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공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들과 검정고시 국어 문제를 푸는 게 나의 과제였다. 십대 후반의 아이들이 초등학생의 독해력이면 풀 수 있는 문제도 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억지로 문제 풀이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여러 방법을 써 보다 하루는 문제집을 덮고 물었다.

“00아, 너 요즘 재미있는 거 있어?”

나는 그 다음 주부터 아이들이 대답한 축구, 게임, 농구 등에 관한 글을 고르고 골라 가져갔다. 놀랍게도 아이들의 눈에 글을 들어가는 듯했다. 나중에는 천천히 분석하며 읽었고, 어떨 때는 내가 이해 못하는 문장을 몸으로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국어 문법이나 고전, 어려운 비문학 지문은 그들의 일상 언어나 관심 언어로 바꾸면서 문제에 접근해 나갔다. 확실히 아이들의 이해 속도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글을 배운 지 1년 반 된 80대 할머니에게 책을 선물한 일이 있었다. 딴에는 할머니의 읽기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삼으면서 글자 크기가 아주 큰 그림책 열댓 권을 골랐다. ‘이건 할머님께 아직 어렵겠지? 나중에 드릴까.’ 하고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담은 동화책(장애인 주인공과 그의 가방을 들어주는 친구의 이야기를 담은 초등 저학년 동화)도 1권 있었다.

한 달 뒤 만난 할머니는 빙긋이 웃으시며 그동안 15권의 책을 세 번씩 반복해서 읽고 한 번씩 필사도 마쳤다고 했다. (나는 반복해서 읽으라거나 필사를 해보시라는 권유를 하지 않았다. 모두 할머니가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장애인 애기들 나오는 책이 재밌더만. 나가, 주변에 있는 장애인들 볼 때 그냥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 마음을 좀 더 알겠어. 그란데 이 책은 장애인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이더만. 그게 좋더라고.”

나의 오만방자한 생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평생 책을 읽은 적 없는 우리 어머니는 딸이 쓴 책을 한 달 동안 천천히 정독했고, 읽은 만큼 매일 나에게 소감을 말해주었다. 읽은 사람이 별로 없는 책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가장 진심어린 독자였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책이 하필 나의 졸작이라 아쉽지만, 그것이 한 달의 독서 경험을 이끈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뒤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머니는 확실히 읽는 양이 늘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지만 읽는 것을 예전보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 딸들에게 공유해 주는 경지(?)에 이렀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아, 독서모임 이야기를 해보자. 독서모임에는 보통 책을 좋아하거나, 너무 많이 읽거나, 읽는 척하기를 좋아하거나, 읽어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거나, 공부로 읽거나, 읽기보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종종 “책을 일 년에 한 권도 안 읽어요. 이제부터 읽으려고요.”라고 수줍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책을 습관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책을 잘 못 읽거나 이해 폭이 좁을 거야.’라고 거의 반사적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이 맞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 특유의 고집이나 그럴듯한 말빨(?)로 포장하는 텅 빈 발언을 보기 좋게 무찌르는 신선하고 새로운 사고가 빛을 발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독서 전문가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주 일부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해마다 독서율이 줄어든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으로 쓰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책을 많이 있는 쪽에서 읽지 않는 사람을 교육하거나 계몽하려는 정책이나 시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책을 신성시하고 고급 읽기로 만들수록 예비 독자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점점 더 찾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사람들의) 읽는 양이 늘고 있다.”는 문장이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좋은 글을 찾아 읽는 것이 좋은 책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책이든 기타 다른 형태의 글이든 그것을 고르는 안목이나 읽기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가장 손쉽고 흔하게 사용되는 방법이 ‘따라 읽기’이다. 저명한 기관이나 교육자, 또는 전문가들이 뽑아놓은 책(글) 목록이나, 많이 읽는 사람들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 읽는 형태를 말한다.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사람마다 결과도 다르고, 읽기 지속성도 많이 떨어진다. 그보다 더 먼저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주제의 책(글)을 충분히 읽고 즐겨보아야 한다. 좀 없어 보이는 것도 괜찮다. 대단한 수상 목록이나 유명한 추천도서에 올라가 있지 않으면 어떤가. 몇백 년 동안 읽히는 고전이 아니어도 된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끌리고 감동하는 책(글)을 골라서 읽어야 한다.

책(글)을 추천하는 사람들이나 전문가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충분히 읽고 즐기면서 얻은 경험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뿐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경험 없이 누군가가 좋다고 하거나 인정받는 것들만 읽다 보면 ‘나의 읽기 경험’은 어느새 도둑맞게 된다. 부디 ‘나의 읽기 경험’을 천천히 쌓으면서 다른 사람의 목록에도 눈을 돌리시길.


글은 한 사람이 공부한 것, 경험한 것, 생각한 것, 탐구한 것, 그의 감정, 욕망, 이상을 담아놓은 것이다. 이것들을 모아 묶은 책을 신성시하거나 엄숙하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책이 다른 것들과 함께 하나의 ‘읽기 형태’로 자리 잡을 때, 그리고 책만의 전통과 고유성이 잘 지켜질 때 사람들은 다시 책을 찾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것뿐이지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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