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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e Mar 08. 2023

Why Are We?

사회와 문명

Now I have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원자탄 개발 성공 후 인터뷰에서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중 비슈누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한 편으로는 핵무기를 확보함으로써 전쟁 억제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가 존재했지만, 반대로 인류는 버튼 하나로 멸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습성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세상에 정말 다양한 재능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 인류는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짐과 동시에, 반대로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특히 이러한 칼의 양날 같은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할 때 되면 상황이 더더욱 복잡해진다. 히브리 성서의 저자들 역시 인간의 이러한 면을 정말 심층적으로 탐구하면서 오늘날 인류를 위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벨탑 내러티브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기록된 족보가 있는데 그중에서 니므롯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 싶다. 노아의 막내아들 함의 아들들 중에 유일하게 훗날 어떤 인물로 성장하는지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우선 흥미롭고 그는 여러 나라를 건국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바벨", 그리고 "앗수르"(아시리아)에 "니느웨". 훗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둘로 분단되어 북쪽 왕국은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하고, "바벨"은 남쪽 유다 왕국을 멸망시킬 "바벨론"의 전신으로 보인다.


족보가 끝나고 창세기 11장부터 내러티브가 다시 시작되는데, 인간이 시날 평원에 정착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시날"은 문자 그래도 "두 강의 땅"으로 아무래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의미하는 듯하다. 흥미로운 건 이곳에 정착한 인간의 계획이다.

벽돌을 만들어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역청으로...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 11:3, 4)


이를 지켜보던 야훼는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져 탑 건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이다. 이 구절 속에 바벨탑의 이름의 어원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혼잡"("balal", בָּלַל) 정도로 해석되는 히브리어 어원을 창세기 저자가 기록해 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창세기를 남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건가? 대부분 한국어나 영어 등의 현대 성경에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Tower of Babel") 그리고 바벨론 제국("Babylon")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 원어를 보면 동일하게 "바벨"(בָּבֶ֫ל, בָּבֶל )이라고 표시했다. 한 마디로, 바벨탑은 고대 이스라엘이 생각한 바벨론 제국의 건국 신화인 셈이다. 하지만 고대 바벨론인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실제 바벨론이 저렇게 탄생했다고 믿지 않고,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 말은 즉슨, 바벨탑 과거 한 사건을 넘어서서 변하지 않는 진리의 Archetype이다.


창세기 11장 4절 후반부를 보면 그 동기가 기록도이어 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의 흩어짐을 면하고자". 이 구절을 천천히 읽어보면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불안감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토록 "흩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야훼가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축복을 여러 차례 내렸었는데, 히브리 성서에 야훼의 "축복"이라는 단어와 항상 따라다니는 구절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야훼가 새로운 인류에게 남긴 축복이다. 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온 땅을 가득 채워라" 정도의 의미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11장, 시날 평지에 정착한 사람들은 이를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해야 할 재앙으로 간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재앙을 그럼 어떻게 피할 셈인가? "벽돌"(לְבֵנָה), 그리고 "역청"(חֹ֫מֶר)이라는 새로운 기술, 새로운 힘의 원천이다.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달해 줬을 때와 미국이 원자탄을 가장 먼저 확보했을 때처럼, 벽돌과 역청으로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 즉 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주는 관문 역할이다. 실제로 고대 바벨론 제국의 이름의 또 하나의 어원은 당시 고대 근동 공용어였던 아카드어로 "신의 관문"("bab-ilim")이라는 의미도 있다.

바벨탑의 모티브가 될 가능성이 큰 에테멘앙키 지구라트의 복원된 모습. 에테멘앙키는 고대 수메르어로 "하늘과 땅의 기초의 신전"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바벨탑은 야훼의 축복을 저주로 왜곡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해 신에 대항하거나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세력들을 의미한다. 훗날 바벨론처럼 문명이나 국가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바벨론은 정말 변화무쌍한 존재로 그 모양을 바꿔가면서 인류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걸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바벨 

이집트에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Edward Poynter 1867년 작) (출처: 위키백과)

에덴동산 이야기처럼 바벨탑 사건 패러다임 역시 히브리 성서 곳곳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토라의 두 번째 두루마리인 출애굽기 1장 11절을 보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위해 비돔, 라암셋이라는 성을 건축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출 1:14)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키워드는 바로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킨 노동인데 바로 "흙 이기기", 그리고 "벽돌 굽기"다.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은 "벽돌"(לְבֵנָה), 그리고 "역청"(חֹ֫מֶר)을 이용해(한국어 성서에는 "흙"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성경에는 창세기 11장 3절과 동일하게 "mortar"로 번역됨) 성읍을 건설했다. 이집트는 새로운 바벨인 셈이다. 야훼는 이 새로운 바벨을 가만두지 않고 결국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애굽을 탈출한다.


때로는 야훼의 선택받은 백성들도 바벨의 역할을 취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다윗 다음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고대 이스라엘의 왕은 바로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 성서는 그가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크다고 기록(열왕 10:23)하고 있는데, 누가 뭐니 해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야훼의 성전 건축이다.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해 준 그들의 신을 위한 성전을 짓는 건 지극히 다양하고 합당한 결정처럼 보인다.


문제는 솔로몬은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로부터 3만 명을 강제 노동자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할 3만 명의 "사역을 감독하는 관리"(שַׂר)를 세우는 데 , 이집트인들도 이스라엘의 노역을 관리할 "감독"(שַׂר)들을 세웠다. 벌써부터 이스라엘 왕국은 이들을 탄압하고 야훼에게 대항한 이집트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솔로몬이 한창 성전 건축을 준비를 마치고 막 사업을 시작할 때, 야훼가 그에게 나타나 마치 경고를 하는 듯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열왕 6:12~13)


야훼는 성전 건축을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야훼의 법도와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것을 강조한다. 성전 건축을 마치고 봉헌하는 예배를 모두 마치고 야훼는 솔로몬 앞에 다시 나타난다.

네가 만일...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열왕 9:4~5)


우상숭배에 빠지는 솔로몬, William de Poorter 작품(출처: 위키백과)

결과적으로 솔로몬이 이 언약을 지켜내지 못한다. 이방인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방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하여, 히브리 성서의 선지자들은 결국 이로 인해 야훼는 주변 강국들,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을 이용해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다.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고향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바벨론 제국 곳곳으로 포로로 끌려가는데, 이로써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중 "포로기"가 시작된 것이다.


솔로몬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아무리 선하고 신의 부름을 받은 거룩한 인간이나 집단이라도 그 거룩한 공동체가 바벨탑으로 변질되는 건 한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오늘의 바벨? 

히브리 성서의 가장 마지막 문헌은 역대기("Chronicles")라는 책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로기까지 쭈욱 설명하는 글이다. 흥미로운 점은 역대기 바로 앞에는 에스라-느헤미야라는 문헌이 있으는 데, 이 책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 배경에는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유대인들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의 칙령이다. 이는 에스라 1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에 1:3)


다음은 역대기 가장 마지막 부분, 가장 마지막 구절로 가보도록 하겠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약간 워딩의 차이는 있지만 에스라 1장 3절 말씀을 거의 복사 붙이기라도 한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점에 이미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기가 끝나고 성전도 재건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서를 편집한 서기관들은 이 같은 결말을 통해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고 있다는 뜻인데, 결국, 유대인들이 물리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포로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벨론 제국도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새로운 바벨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은 예수가 죽은 후 세상에 어떤 일이 있을지에 대한 예언이 담긴 묵시록이다. 이 종말론적인 묵시록의 내용을 얼마나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훗날 주제로 다뤄보겠지만, 중요한 건 1세기 로마 제국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사도 요한이 야훼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이다. 요한계시록 17장을 보면 요한은 환상 속에서 붉은빛 짐승을 타고 있는 여인을 보게 되는데...

그 여자는...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계 17:4~6)


실제로 다니엘, 예레미야 같은 히브리 성서의 선지자들은 세계의 대제국들을 "짐승"에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맥락을 보면 이 "바벨론"은 로마 제국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바벨론은 결국 로마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만 믿고 야훼에 대항하는 모든 나라, 모든 세력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야훼는 그 악한 세력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있다. 힘을 가진 자들에겐 대재앙이지만, 야훼를 신뢰하는 선한 백성들에게는 이보다 큰 위로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국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집단과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다. 종교집단이나 시만단체, 비영리 단체 등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을 하지만, 어느새 그 공동체의 목적을 달성해 영향력을 가지는 것보다 어떻게든 세력만 키우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 답답하고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조직과 집단, 국가보다는 개인에게 더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더 건강하고 좋은 영향력 있는 집단이 있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건강한 자아와 사명을 발견하고 키워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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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야훼와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탐구하고 이와 같은 인간이 모여서 집단을 형성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을 기초로 히브리 성서의 세계관을 탐구했다. 그렇다면 바벨과 같은 세상에 내 놓인 인간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Adam and Eve Driven Out of Eden", Gustave Dore (Wil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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