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중인 나그네, 인간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가 바로 '포로기'이다. 구체적으로 이 '포로기'는 기원전 6세기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서에는 '느부갓네살'이라고 표기)가 이끄는 바벨론 제국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 왕족과 귀족들을 제국 곳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기간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포로기' 중 이스라엘의 민족적, 이념적,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히브리 성서의 모습도 이때 완성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
필자는 '포로기'라는 용어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히브리 성서뿐만 아니라 어떤 문헌이나 문학 작품을 연구할 때는 해당 텍스트가 만들어진 목적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서 왜 만들어진 건가? 많은 고고학자, 성서학자 심지어 신학자들도 성서는 역사적 자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비평하는 경우가 많은데,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성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서가 만들어진 목적은 무엇인가? 필자가 "Why Are We"에서 논증한 거처럼 "바벨"(בָּבֶל) 탑과 바벨론 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바벨"은 당장 그 역사적 사건에만 그 의미가 국한된 것이 더 아니라 보다 훨씬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면, 흔히 "역사서"로 분류되는 열왕기(1, 2 Kings) 두루마리를 보자. 다윗과 솔로몬부터 여호야김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과 이들의 업적을 정리해 놓은 누가 봐도 역사적 문헌이다. 다음은 르호보암 왕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마무리 구절이다.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4:29)
다음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명 높은 왕 중 하나인 오므리 왕의 역사 마지막의 마무리 구절이다.
오므리가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는 이스라엘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6:27)
이스라엘과 유다의 거의 모든 왕들의 역사가 끝날 때마다 이렇게 한 섹션이 막을 내린다. 미상이지만 열왕기 두루마리를 편집한 서기관들이 스스로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히브리 성서는 애초에 조선왕족실록이나 중세 연대기처럼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일목연하게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헌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전하는 건 선지자적, 예언자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재해석한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그래서 실제로 유대인들은 흔히 기독교 성경에 "역사서"로 분류된 문헌들을 "선지자서"로 분류시켜 놓았다.
다소 샛길로 빠졌지만, 이러한 히브리 성서의 제작 목적과 율법서, 선지자서와 성문서(TaNaK)라는 컬렉션 전체의 내러티브와 메시지의 맥락을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포로기'보다는 '망명기'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 영어 성서와 학계에서도 "Babylonian Captivity" 그리고 "Babylonian Exile" 두 가지 표기법이 혼용되고 있는데, 후자가 더 옳은 표현이다. 히브리 성서의 거의 모든 내러티브는 망명의 이야기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의 큰 플롯이 한 차례 망명으로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태초의 인류가 죄로 인해 낙원으로부터 쫓겨나(창 3:23)는 거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창 12:1, 2), 이삭(창 26:6~11), 야곱(창 27:43, 44), 일명 '족장'(Patriarchs) 모두가 이방 땅으로부터 야훼의 구조를 받아야 했으며, 훗날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가뭄을 피해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로 이주하다가 노예 살이를 하게 되고 결국에 왕국은 멸망하고 바벨론 망명기가 시작되었다.
망명기는 왜 시작된 걸까?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야훼를 저버리고 바알과 같은 이방 신들의 숭배를 문제 삼았다. 이는 솔로몬 왕이 이집트와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면서 그들의 종교와 신을 받아들이면서 이스라엘은 서서히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시문으로 애통해한다. 많은 선지자들이 당시 이스라엘을 바람피우는 음녀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에스겔 6:4, 5)
망명한 이스라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일명 '포로 귀환기' 중 유대인 총독 느헤미야는 '토라' 두루마리에서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야훼에게 올리는 기도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되돌아본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느 1:7)
태초의 인간이 금지된 열매를 먹지 말아라는 계명을 어긴 거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야훼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 국가의 군사원조, 우상, 성적 타락과 같은 금지된 열매를 먹어 약속의 땅으로부터 추방되어 낯선 이방 땅에 벌써 수 십 년째 방랑 중이다.
잠시 에덴동산 이야기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이쯤에서 꼭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인간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후, 신과 관계가 단절된 후에도 인간의 창조와 존재 목적은 여전히 유효한가? 낙원에서 쫓겨난 죄인이지만 인간은 여전히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있고 여전히 야훼를 닮은 피조물이다. 이 때문에 야훼가 인간에게 가장 먼저 내린 법이 바로 살인을 금지였다(창 9:6). 세상의 대리 통치자로 만들어진 인간은 야훼와 함께 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신과 단절된 상태에서도 하늘에 끝이 닿는 탑과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거처럼(창 11) 신적인 잠재력과 능력을 갖춘 걸 관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삼손, 심지어 다윗과 솔로몬처럼 때로는 정말 악한 인간도 야훼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게 아닐까?
유대인들이 이미 바벨론 제국 곳곳으로 끌려갔을 때, 예루살렘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유배 중인 제사장들, 선지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서신을 보낸다(렘 1:1). 편지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며..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5, 6)
태초의 인간과 족장들에게 야훼가 존 언약의 핵심 키워드 "번성하고". 이들은 이방 땅에 사로잡혀 있는 와중에도 신은 이들은 번영할 수 있도록 축복하고 또 그리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야훼에게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마지막 두 구절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평안("shalom" שָׁלוֹם)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에는 야훼가 아브람을 통해 온 땅의 족속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언약의 내용이 오묘하게 녹아들어 있고, 또 야훼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땅이 없어 방랑하는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 언젠가는 약속의 땅을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또 이집트나 시리아(창 28:14, 15)로 이주를 해야 할 때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담겨있다.
앞서 등장한 예루살렘 총독 느헤미야도 같은 기도문 안에 야훼의 이 약속을 상기시키려고 하는 듯하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8)
성서의 스토리가 끝난 후에도, 비록 약속의 땅에 물리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망명이 끝을 기다리는 삶을 인간의 현실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고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명자로서의 삶이다.
히브리 성서 중 망명기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다니엘(דָּנִיֵּאל "야훼는 나의 재판관")이라 생각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에 끌려온 유대인 엘리트 청년들인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들에 대해 특별한 지시를 내린다.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단 1:4, 5)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바벨론(목성의 위성도 바벨론이 최초로 관측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의 언어와 학문을 교육받고, 심지어 바벨론식 이름도 받았다(다니엘은 벨드사살, בֵּלְטְשַׁאצַּר, "바른 자의 보물의 주인" ).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몇 년 사이에 이제 완전한 바벨론 사람이 되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충성된 신하로 평안하게 살아가는 듯하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 말살정책을 어릴 때부터 배워 온 한국인이 봤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청년들이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왕이 하사하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단 1),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금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등,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의 신, 야훼에게 거역하는 행위를 요구받을 때는 소신을 지키는 모습을 보인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있는 백성들에게 요구한 삶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토라와 선지자서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구절들을 분석한 결과, 히브리 성서의 세계관에서 지구상 모든 인간은 일종의 땅이 없는 나그네, 혹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망명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봐서 알 수 있는 건, 인간은 결국 창시자인 야훼에게 돌아가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야훼는 언젠가 궁극의 바벨을 무찌를 날이 올 것이다. 야훼의 모든 백성들의 망명기가 끝나고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진정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안에서 여전히 삶을 살아가면서 나의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는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 주제로는 망명기가 끝나는 걸 기다려가면서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는 인간과 더불어, 이 내러티브에서 야훼의 역할에 대해서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