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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슬비 May 28. 2020

다시 일어서기

열네 번째 책을 덮은 곳은 정신병동이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묘사되곤 하는 그 곳. 나에게 정신병동은 가장 좋은 독서 장소였다. 휴대전화도 없고, 일을 할 필요도 없고, 펜도 사용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좋은 독서 장소는 없을 거다. 평소엔 꾸미지 않던 내가 나름 예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있었다. 그런 날 아침, 나는 일을 벌였다. 이겨내고 있었다. 모두가 놀란 아침이었다. 나를 구하러 와준 경찰 언니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밥 먹을래?“, “아이스크림 먹을래?“ 물어봐주었다. (그 와중에 밥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그 곳으로 발령받은 첫 날 첫 출동이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겨내고 있었다.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극복 이야기를 책으로 냈고, 그 이야기는 많은 공감을 받았다. 누군가 그랬다. 우울증은 아주 작은 빨대로 세상을 보게 한다고. 그게 맞다. 나는 그 날 아주 작은 빨대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 고통은 끝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아주 많이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늪과 같은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나는 모로코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고 있었다. 중간고사도 마치지 못 했던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중간고사를 치러냈다. 공황장애로 쇼핑 나가는 게 두려웠던 나는 스스로 어느 정도는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이겨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또 우울증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울증이 내 독서의 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피해갈 수 없다. 폭발하듯 터져버린 감정은 금세 차분해졌다. 그래서 병동 속 나는 모범 환자였다. 어떤 극단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고, 환우들과 대화를 하고, 의료진에게 말도 거는 적응력 뛰어난 환자였다. 그 중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독서였다. 급하게 입원하면서도 책은 정말 많이 챙겼다. 첫 번째 입원에도 두 번째 입원에도 모두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입시 이후 글자에 이렇게 집중을 잘 한 건 정신과 입원 도중이 아닐까 싶다. 환자 입장에서 정신과 입원이 병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약물과 충동 조절인 것 같다. 상태 변화를 자세히 살피고 약물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자살 충동과 자해 충동을 느끼진 않았지만, 느끼는 환자의 경우 위험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내가 그 외에 도움을 받았던 것이 독서였다. 틈만 나면 울리는 아르바이트 단체톡, 자극적인 미디어, SNS 등의 방해 없이 오로지 책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책들을 내 마음에 대비해보고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멀리 나아가기 전에 무너져 버린 내 자신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 걱정없이 장르 소설에 푹 빠져들기도 하고, 어려운 철학책을 읽으며 존재에 대해 생각도 해보고, 옛 성인의 말을 들으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기도 하며 나는 나를 치유했다.    멀리 나가기 전, 마음을 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단단해진 채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내면에 상처는 있다. 그리고 그 가시는 우리 발목을 잡는다. 야망을 가진 여성으로서 험한 세상을 강하게 내딛기 위해서는 꼭 여린 내 모습도 바라보아주어야 한다. 외면한 채로 꿋꿋히 나아가다가 무너진 나처럼 미련한 짓은 하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그게 어디로든 떠나려면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 내 마음을 단단히 해두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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