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비가 좀 왔나 보다. 방 창문과 앞 베란다 창문을 여니 촉촉하면서도 초록초록한 바람이 부드럽게 집안으로 들어온다.
선거일 다음 날부터 날씨가 맑고 상쾌하다. 심지어 공기에서 평화로운 느낌마저 든다.
신기하게도 그간에 컨디션 난조로 ‘병든 닭’처럼 지내던 날들에 한 순간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강남 성모에서 남편의 관상동맥 조영술이 있었다. 혈관 말단이 좁아진 부위가 있기는 했지만 스텐트 시술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약물 치료를 해도 된다고 주치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한시름 놓고 일층에서 수납을 했다. 강남 성모병원이 대규모로 신축 확장을 한 뒤에 처음 와봤는데, 이 노른자 땅 위에 건물을 몇 개나 올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로비에는 ‘병원 건립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라는 제목하에 기금 마련에 동참했던 동문들 성함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조금 큰 글씨로 성함이 새겨진 분들은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한 것 같았다.
남편이 장인어른도 기부하셨을 거라고 찾아보라고 했다. ‘김’씨 성 명단 쪽에서 쭉 내려가 보니 우리 아빠 성함이 딱 새겨져 있었다.
‘어! 아빠다!’ 우리에게 말씀도 안 하시고 모교에 기부금을 내셨나 보다. 반갑고도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최근에 남편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하는 큰 경사가 있었다. 모 회사와 대표가 따로 있기에 회사 지분은 남편에게 없지만 스톡옵션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실적을 올려서 주가를 끌어올려야 우리가 주식을 팔 때 이득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다.
남편이 주식 팔면 좋은 차를 한 대 사주겠다고 했다. 요즘 유튜브 명풍 주얼리와 시계 리뷰에 푹 빠진 나는 자동차에 플러스 이것저것 유명하다는 시계, 팔찌, 반지, 목걸이 그리고 가방을 사달라고 했다. 결혼할 때 나는 남편으로부터 반지 한 개도 못 받았었다. 그때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더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내가 모은 돈으로 예물을 하고, 가전을 샀다. 거기에 결혼 준비에 쓰라고 아빠가 주신 돈으로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20년 이상 우리 집에는 함구를 하고 살았었다.
그래서 보상심리로 물욕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성모 병원 로비에서 아빠 성함을 발견하고서는 ‘아차’ 싶었다. 딸아이가 수술받고 새 생명을 얻은 서울대병원에 십 년 안에 기부하기로 했던 우리 부부만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치스러운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붕 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갖고 싶었던 물건들의 가격을 더해보니 그 총액이 꽤 된다. 그 금액만큼은 주식을 처분하고 나면 꼭 병원에 기부를 하자고 남편에게 얘기를 해야겠다.
그때의 애달프고 절박했던 마음과 의료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