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피에타
피에타는 예수그리스도의 시신을 안아든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져있다. 비탄, 슬픔, 경건한 동정 등을 뜻하는 이 단어는 오늘날 단순히 하나의 뜻이나 작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오랜시간 예술에 있어 중요한 테마로 여러차례 소비되어 왔다.
그 대상이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종교적으로도 강렬한 의미를 가지는데, 지나온 역사동안 예술의 발전은 종교적인 것과 항상 더불어 왔으니 <피에타> 역시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있다고 해서 배척되거나 가치가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기독교의 핵심 주제는 우리를 사랑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이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해주시고, 3일 뒤에 부활함으로써 사망과 악한 것들로부터 승리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얼마 뒤 부활함으로써 승리를 선포하지만, 그 앞에 전제된 예수 그리스도의 무결성과 그 죽음의 비극성이 심화될수록(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그가 우리를 위한 사랑때문에 대신 제물로 드려지는 사건이므로) 그 사건은 더 큰 의미를 가지고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더한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순간 자체가 비록 기독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아닐지라도, 그 순간을 포착하여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강렬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피에타는 이런 이유에서 종교적인 상징물로써 굉장히 적합하고, 동시에 예술적 테마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작품이자 주제이다.
오늘날 피에타라는 주제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으로만 소비되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로 확장하여 변주되고 그 깊이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종교적 상징으로써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누구에게나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예술의 전당에서 2024년 3월 14일부터 2024년 3월 24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피에타>도 이와 결을 같이 한다. 종교적인 소재를 가지고 제작된 뮤지컬이지만 종교적인 메시지보다는 비극적인 서사를 어머니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작품의 하나로 바라볼 때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선보여지는 시기가 위와 같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데, 2024년의 사순절이 2월 14일부터 3월 28일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이란 기독교에서 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 동안 기도하고 때론 금식도 하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돌보는 시기이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시간에 함께 동참하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번 뮤지컬이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예술적 작품으로써의 면모를 강조하는 가치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 소재가 종교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만큼 사회맥락적인 부분을 고려하면 해당 기간에 공연되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용소 문학의 대표 작품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은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는 그의 생활과 대비되어 비극을 심화시키는 장치로 쓰인다. 좋은 날씨는 역설적으로 나의 처지를 비관하게 만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그냥 파멸을 향해 가는 것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일 때 주인공을 떨어뜨리는 것이 더 큰 충격을 준다. 1층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보다는 10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프고, 10층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보다는 지상에서 10층까지 마침내 힘겹게 기어올라간 인간이 추락하는 것이 더 비극적인 법이다.
이 공식아닌 공식에 맞춰 뮤지컬 <피에타> 역시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다. 뛰어노는 아이가 어찌나 예쁜지 함께 신나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은 이후에 벌어질 비극적인 사건을 보다 심화시킨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실감될수록 좋다. 파멸에 앞서 그들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설득되고 주체에게 깊숙이 공감할수록 비극은 보다 뼈아프게 전달된다.
초반부에 아이가 실제로 옆에 있는 것처럼 귀여워하고 대화를 하면서 연기하는데, 허공에 대고 연기함에도 불구하고 출연 배우의 역량이 뛰어나 전혀 어색함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나는 중반부 좌측 좌석에서 관람했는데 반대쪽으로 가서 관객들에게 아이를 인사시킬 때 배우가 관객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잠시동안 순간적으로 아이가 진짜 있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이 뮤지컬이 1인 뮤지컬이라는 사실이다. 모노드라마 형식은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데에는 적합하지만 역량이 부족할 경우 단순하고 지루한 독백 위주로 극이 진행되기 쉽다. 그러나 출연자의 역량은 나의 기대지평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 공연은 관객 참여형 공연이기도 했다. (가상의) 아이와 관객들이 인사를 나누게 하거나, 방금 갓 구워낸 (가상의)빵을 관객들에게 건네주고 나눠먹게 한다거나 하는 순간들은 1인 뮤지컬이 흔히 발생시킬 수 있는 지루함을 떨쳐내고 극에 보다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는 장치로써 작용했다.
( 배우 김사라 )
하지만 이 작품은 <피에타>가 아닌가. 아무리 아이를 해맑게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어도, 출가했던 아이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축제를 벌여 관객들과 갓 구운 빵을 나누어 먹어도 결국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해하는 배우의 모습과 달리 무대는 이미 최소한의 조형물과 조명으로만 간단하게(혹은 휑하게)꾸며져 있고 그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출연대상이 있지는 않은데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허공에 연기하는 그 모습이, 연기 수준이 뛰어나서 너무나도 설득력 있으면서도 동시에 기괴한 슬픔과 절망을 자아낸다고 느꼈다.
이번 공연은 규모가 작은 자유소극장에서 진행된 공연이기는 했지만 혼자서도 무대를 가득 채우는 장악력이 인상깊었다. 또한 관객참여형과 허공에 대고 연기하는 다소 어색해지기 쉬운 연기 방법을 자주 차용했음에도 1인극의 공연을 이끌어가는, 힘을 잃지 않는 배우의 노련함이 인상깊었다.
피에타라는 주제를 종교적인 해석보다는 엄마와 아이 사이에 느끼는 유대와 끈끈함, 그리하여 그것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부모의 강렬한 감정과 비극적 서사를 중점으로 풀어내어 해석한 작품이라는 점, 1인 뮤지컬임에도 다양한 기법을 차용하여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해내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