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logue 002
모든 글쓰기는 지난한 자기소개서다.
그래, '여하튼' '하릴없이' 글을 쓰자고 다짐은 했다만 무얼 어떻게 쓸 거냔 말이다. 저 문장이 고민의 답이라 할 순 없겠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글쓰기는 결국 자기소개서다.
어른이 된 후론 매년 책 한 권도 겨우 읽었는데 올해는 벌써 17권을 넘겼다. 처음엔 마케팅 서적부터 읽었다. 본업은 마케터니까. 그러다 점차 소설이 비중을 늘려갔다. 여기서는 조사가 중요하다. 소설'이' 비중을 늘려갔다. 내 의지라기보단, 소설이 다른 소설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는 말이다. 단순히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부업은 칼럼니스트니까. 그래서 스티븐 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었다. 소설가의 자서전에 가까운 책이라 그다음엔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시작으로 <살인자의 기억법>, <인간 실격>, <자기 앞의 생>을 읽어갔다. 뒤의 두 작품이 유난히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작가의 생이 읽혔다. 지어낸 이야기를 읽었을 뿐인데 작가의 머릿속을 훤히 보고 온 것 같았다. 스티븐 킹이 책에서 내내 말한 게 이거였구나. 내가 창조하는 세계는 나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원동력은 허영심이다. 허영 중에서도 지적 허영이라는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함께 칼럼을 연재하는 영화감독님이 다독가라는 건 언제나 큰 자극이었다. 매번 나보다 좋은 문장을 구사하시니까. 칼럼의 주제도, 거기에 담긴 생각의 범위도 넓고 다채로웠다. 누가 그랬더라, 직접 경험은 한계가 있어서 책을 읽는다고, 타인의 경험을 내 것으로 취하기에 책만큼 쉽고 싼 게 없다고. 어쨌거나 통근 시간이 불가피하게 늘어나면서 책을 읽게 된 건 30대에 했던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이었고, 지나고 보아도 내 삶의 전환점이 되리란 건 자명한 일이다.
아무런 인물도, 플롯도, 사건도 없이 그저 생각을 쏟아내기만 하는 이따위 글도 괜찮을지는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단순히 생각을 시각화하는 작업이긴 해도 쓸모없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쓰다 보면 별안간 좋은 문장이 나오거나 의외의 해답이 나오기도 하고, '여하튼'이나 '하릴없이' 또는 '지난한' 같은 단어도 꺼내어 쓰게 되니까. 뭐라도 되지 않으면 어떠랴. 지금 읽고 있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카를로 로벨리가 말했다. '저 위, 우주에 정말 드넓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변두리 구석에 위치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런 은하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우주적으로 생각하자면 뭐라도 되어봤자 아무것도 아닌 입자 뭉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