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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 영 May 26. 2021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월 500만 원씩 지급하라!

1교시 <행복> 여섯 번째 이야기


2021년 3월 20일 '세계 행복의 날',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 발전 해법 네트워크(SDSN)가 ‘2021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하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핀란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밝혔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건강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 삶의 선택 자유, 공동체 나눔(관용), 부정부패 인식의 항목을 토대로 산출한 결과에서 핀란드는 4년 연속 1위를 기록했으며, 이를 이끈 요인은 핀란드의 탄탄한 복지정책과 사회 안전망이라고 덧붙였다.


탄탄한 복지와 사회 안전망은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해야 하는 일이며, 이는 오직 정치를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 핀란드는 국민에게 먹고 살 걱정이 없게끔 기본소득을 제공한다. 무상 급식, 무상 교육이다. 대학에 가지 않고 직업학교로 가도 된다.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지어 직업을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 백수가 되어도 국가는 생존을 보장해 준다. (정말 매력적이다. 내가 핀란드인이라면 장래희망란에 백수라고 당당히 적을 것이다.) 장래희망란에 의사, 변호사, 회계사, 유튜버, 아이돌을 적어도 이것은 절대 돈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하고 싶어서 선택한다. 꿈을 위해 열심히 해보다가 안되면, 그냥 다른 거 해도 된다. 말도 쉽고, 실행도 쉽다. 핀란드는 국민의 실패를 따뜻하게 껴안아준다. 사회 안전망은 외세의 침입을 막는 성벽, 핵무기, 외교력만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화재로 삶의 건물이 불타고 있을 때, (20층, 30층, 40층, 50층, 60층, 70층, 몇 층이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난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방관이 바로 사회 안전망이다. 행여 힘이 빠져 아래로 떨어진다 해도, 방방 탄다고 생각하라고, 떨어져도 괜찮다고, 그 사람 아래에 설치된 튼튼한 그물이 바로 사회 안전망이다. 그게 나라다. 


한국은 아직 소방관도, 그물도 부족하다. 한국은 작년 순위보다 많이 올라서 50위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를 읽으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를 톺아본다. 거기에 나만의 한국 현대사도 더해 본다. 둘의 합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적어도 내 생에, 한국이 행복 순위 10위권에 안에 드는 일은 없다. 우리나라는 핀란드가 될 수 없다. 40년 이상 살아보니 알겠다. 19년 전 강사생활을 시작할 때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나 난 아직 생존 불안에 시달려 잠들지 못해 밤을 지새우는 날이 아직도 많다.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날라고 떼쓰는 게 아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국민 모두가 생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수준 정도까지는 핀란드처럼 국가가 보장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도 순진한 생각임을 안다. 그래, 순진하니까 (더 순진하게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철없는 아이처럼) 한마디 더 하련다. 국가는 쓸데없는 곳에 세금 쓰지 말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좀만 더 걷어서 모든 국민들에게 통 크게 월 500만 원씩 주면 안 되냐? 500만 원은 나름 의미 있는 금액이다. 




2011년, KBS 다큐멘터리 <행복해지는 법>은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뤘다. 이 다큐는 월 430만 원이 행복의 변곡점이라 했다. 월 430만 원을 벌지 못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불행하단다. 월 430만 원의 지점을 넘어서면 그때서야 안정감에서 오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2018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 모의고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뤘다.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1000명의 미국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돈이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카너먼은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사람이 일 년에 7만 5천 달러를 벌면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8천5백만 정도 된다. 월 700만 원 선이다.) 


What is the significance of $75,000? It appears to be the income considered “adequate” to meet people’s basic needs. 
[2018년 11월 고2 전국 연합 모의고사 21번] 

7만 5천 달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소득으로 보인다. 


행복 보고서도 그렇고 카너먼도 그렇고,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덧붙인다. 기본 욕구, 즉 생존 걱정을 해소한 후에는 큰돈을 버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필요 이상의 많은 돈을 버는 인생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행복하고 싶으면 큰돈을 벌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430만 원 혹은 700만 원을 벌 수 있으니, 이제 행복을 위해 더 이상 돈을 벌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존재할까? <돈의 속성>의 저자 김승호는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도 부자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글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깨닫고 실천하는 현인이 과연 대한민국에 존재할까? 


나는 월수입이 500만 원은 되어야 한국 사회에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에게 (430만 원에다가 그간 물가상승률을 고려해서. 이왕 상상하는 김에 핀란드 보다 더 통 크게!) 월 500만 원씩 기본소득을 준다고 가정해 보자. 모든 국민이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세상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냥 상상해 보자. 상상만으로 난 벌써 행복하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바뀔까? 레드 썬!이다. 


직업병이라 학생들의 경우가 먼저 떠오른다. 학생들이 굳이 SKY에 가려고 할까? 아니 대학에 가고 싶어 할까? 모든 초점이 돈이 아닌 개인의 자아실현으로 모이지 않을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스무 살 되기 전까지 서둘러서 결정할 이유도 없다. 진정한 자아에 대해 사유하는 철학적 삶은 이성적이어서 이상적이다. 학생들은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로 인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공부, 즉 인문학, 문학, 예술을 탐구하게 된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도 찬란한 발전을 이룩할 것이다. 이런 젊은이로 가득 찬 대한민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한데 모인 대한민국은 코로나 19 따위는 19일 만에 전멸시켜 버리는 행복한 사회, 행복한 국가다. 


아쉽지만 이제 행복한 상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500만 원을 지급하는 기적은 조만간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00만 원도 어렵다. 허경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종종 기적을 행사한다고 하니까.) 대통령은, 국회의원은, 정치가는 바로 우리 국민이 선출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국민은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허경영을 대통령으로 뽑을 마음의 준비도, 이성적 퇴화도 아직 되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의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빈부 격차를 묵인한다. 마르크스가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이 지경에 이른 세상을 보며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는 애초에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그니엘과 에르메스는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건축가 유현준은 저서 여러 권에서, 권력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볼 때 나온다고 했다. 권력을 향한 추구는 인간의 DNA에 입력된 원초적인 욕망이라고도 했다. 욕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권력은 모두가 갖지 못한다. 권력의 시퀀스는 돈부터 시작된다. 결국 가장 돈이 많은 자가 가장 높은 곳의 시그니엘에서 살고, 가장 높은 가격대의 에르메스 가방을 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나만 그렇게 할 수 있고,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야 시그니엘이고 에르메스다. 시그니엘은 롯데가 만든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들었다. 에르메스는 티에리 에르메스가 만든 게 아니다. 우리의 욕망이 만들었다. 당분간 우리나라에서 저 높은 곳에 올라가 낮은 곳에 있는 아래 것들을 내려다보고 싶어 하는 욕망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핀란드는 모두가 이왕이면 같이 잘 살자는 쪽으로 욕망의 평준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핀란드는 현재 행복순위 1위 국가이고, 우리나라는 아직, 50위다.  





19년 전 당시의 내 삶은 돈 때문에 불행했다. (젠장.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영화일을 포기하고 평택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줄곧 이 나라가 도대체 나에게 해준 게 뭐 있냐며 틈만 나면 술 없이도 주사를 부렸다. 젊은이가 야심 차게 도전했고, 아쉽게도 실패했다. 그럴 때 국가는 괜찮다고, 젊을 땐 그럴 수 있다고, 어깨를 토닥거려주며 다시 한번 일어나 헤치고 나아가자고, 양희은의 상록수를 불러주며 응원해야 되는 거 아닌가? 물론 내가 돈을 잘못 쓴 건 맞다. 갚아달라고 떼쓰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국가는 이런 나에게 담당 공무원을 배정해서 영화에 관련된 안정된 직업을 알선하여 생존을 영위하게끔 장려하고, 쓰디쓴 실패를 통해 얻은 소중한 교훈을 발판 삼아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젊은이로 성장시켜 국가의 영화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문화강국의 밀알이 되게끔 이끌어야 하지 않냔 말이다!  간혹 엄마랑 통화하면, 매번 우리 아들 믿는다고 말한다. 엄마 나 믿지 마,라고 할 수 없어서 알았다고 대답한다. 그래 엄마 말이 맞다. 내가 돈이 없지, 신용이 없냐? 왜 국가는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냐? 도대체 왜 공무원은 안 보내고 문신 형님을 나에게 보내냔 말이다! (그분도 바쁘실 텐데.)  


핀란드로 이민 가자, 가야 된다, 가고 싶다. 자일리톨 껌을 틈만 나면 씹으면서, 대한민국을 틈을 내어 씹었다. (핀란드 사람은 자일리톨이라고 하면 못 알아먹는단다. 핀란드어로 '크쉴리톨리(Ksylitoli)'라고 말해야 알아먹고 '휘바, 휘바(좋아, 좋아)' 해준다. 내가 이태원 술집에서 해봤다.) 원장을 처음 만날 때도 난 껌을 씹었다. 어금니에 껌을 딱 부치고 이야기를 나눠서 알아채진 못했을 거다. 그 학원 첫 수업을 들어갈 때도 껌을 씹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업한다라는 시건방짐. 나는 딱 그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 내가 봐도 역겨운 나와, 날 보며 역겨워하는 학생들로 가득 찬 교실, 그 안의 수업. 내 삶은 무성의했고, 무의미했다. 





문신 형님과의 전화통화는 씹고 있던 껌을 뱉을 정도로 성의도, 의미도 있었다. 아무리 술에, 잠에 취했어도 문신 형님의 전화는 날 깨어나게 했다. 문자 따위는 정 없어서 꼭 음성통화를 고집하는 형님이다. 늦게 받으면 큰일이라도 날까 봐 수업시간이건, 앞에 원장이 있건 말건, 세 번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무조건 받았다. 문신 형님은 월급날을 나보다 더 잘 알았다. 행여 이곳까지 수고스럽게 왕림하실까 봐 일원의 오차 없이 꼬박꼬박 계좌이체를 실행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문신 형님이 있었고, 고로 존재했다. 산 송장처럼 생기 없는 얼굴이 문신 형님의 돈 부치라는 전화를 받을 때면 새신부 마냥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시원 월세는 15만 원, 여기에 문신 형님에게 부친 돈을 빼면 20만 원 정도 남았다. 20만 원으로 한 달 살기 도전! 처음에는 할만했다. 친구 A에게 밥이며 술이며 담배며 빌붙어서 살았다. 딱히 뭐라고 나에게 불평을 한 적은 없지만, 돈이 없기에 염치도 없음을 이해해 주었, 을거라 생각한다. 


학원 원장이 나를 찾았다. 내 처지가 딱한 것을 알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했다. 열심히 일하면 월급을 올려주겠다고도 말했다. 어쩜 조감독이랑 똑같은 소리를 할까. 원장은 나에게 프로처럼 일하라며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라 했다. 프로는 긍정적인 사람인가? 프로는 당장 쌀이 떨어져도 주어진 일만큼은 기가 막히게 해내는 사람인가? 프로는 돈에 움직인다. 그리고 돈에 걸맞은 책임을 다한다. 열심히 하면 돈 더 주겠다는 말은 더러운 자본가들이 노예를 부릴 때 쓰는 말이다. 난 월급 150만 원만큼만 일했다. 더 열심히 하지도, 더할 힘도 없었다. 더 열심히 할 이유도 없었고, 적당히 일할 이유는 충분했다.


말로 벌어먹고 사는 강사들은 쉬는 시간에도 말을 안 쉰다. 날씨가 어떻네, 요즘 경제가 어떻네. 쉬는 시간에는 그 취지에 걸맞게 입을 쉬겠다는 나의 의지를 가벼운 미소로 표현할 때면, 강사들은 이를 잘못 이해한 듯 몇 살이냐, 고향이 어디냐는 호구조사가 한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자신이 이전에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까먹고 나에게 처음 물어보는 듯 질문하는 강사도 있었다. 학원 오기 전에 뭐했냐라는 질문은 빠짐없이 나왔다. 난 그때마다 그냥 (인생) 공부했다고 답했고, 그들은 고시 공부했었구나 라고 어림잡았다. 이내 소문은 날 사시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법률 상담을 나에게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이도 없었고, 상관도 없었다. A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고 단단히 부탁했다. 의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게 의미 없으니, 굳이 이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살았다. 의미 없는 삶은 돈 없는 삶만큼 불행한 삶이었다. 난 행복할 수 없었다. 생명 유지를 위한 삶을 살았다. 나의 삶은 지연된 죽음일 뿐이었다. 죽을 용기도 없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한심한 나였다. 문신 형님한테 돈 못 갚아서 맞아 죽을까 봐, 죽지 못해 살았다. 우연히 붙잡은 책에는 쇼펜하우어가 있었고, 책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 했다. 삶은 비극의 연속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사업가의 길을 걸었고 그로 인해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냈단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겪는 인지 부조화의 고통. 나도 지금 딱 그 심정이야, 하며 쇼펜하우어에게 감정이입이 되려는 순간, 그가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다는 대목을 읽자마자 책을 벽에 던져 버렸다. 


쇼펜하우어는 금수저였다. 쇼펜하우어는 진짜 고통을 몰랐다. 그날 새우깡에 소금을 찍어 먹었다. 짰다. 그래서 소주 세 병을 들이켰다. 내 몸은 쇼펜하우어보다 더 짠한 인생이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바닷물을 방금 마신 듯 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니 얼굴도 머리도 이마의 주름도 다 쇼펜하우어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찌부러진 책을 책장에 꽂을려다가 (쇼펜하우어가 남같이 않아 보여) 그냥 손에 들고 학원에 출근했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의 세계 <출처 : 구글 이미지>




영화를 관둔 사람에게도 영화와 같은 일은 펼쳐진다. 그날 새로 입사한 영어강사 B는 재기 발랄한 자기소개를 끝낸 후, 마침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B강사는 안녕하세요,라고 나에게 인사했지만 나는 껌을 씹으며 B강사의 말을 듣씹 했다. 


쇼펜하우어 좋아하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깜짝 놀라 양손으로 솟아오른 머리를 아래를 꾹 누르며, 나는 B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내 책상 위에 놓인 쇼펜하우어의 책을 향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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