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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 영 Jun 20. 2021

고시원 화장실에서 외로움을 깨닫다.

 사람이 소주 세네 병 마시고 잠에 드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 소주 세네 병을 마시고, 이 일을 거의 2년 내내 했다면 비로소 놀라운 일이 된다. 보통 이런 경우를 알코올 중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난 중독은 아니었다. 손이 떨리지도 않았고, 술 생각이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술은 내 안의 존재했던 마그마와 같은 울분을 가라앉히는 신경 안정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나아질 것 없어 보이는 내 가련한 인생을 위해 한 병. 항상 말도 안 되는 일만 벌어지는 뉴스 안의 세상을 보며 핀란드로 도망가야 된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한 병. 그리고 왠지 날 싫어하는 사람들로만 가득해 보였던 학원으로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는 절망감에 한 병. 내가 좋아하는 유시민 의원이 (내 인생 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다.) 울부짖으며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통과를 저지하려는 장면을 보며 세 병. 탄핵안이 결국 통과됐을 때 네 병. 기가 막힌 안주는 뉴스로 충분했고, 밥 대신 술을 먹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날은 특별한 일이 없었다. 학원에 출근했고, 퇴근했고, 술을 마시고 잠에 들었다.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일어났다. 다 뜨지 못한 눈으로 고시원 화장실로 들어갔고, 눈을 감은 채로 소변을 봤다. 사람들의 부정확한 조준 실력을 한탄하며 제발 소변기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서서 소변을 봐달라는 고시원 총무의 간절한 눈빛이 생각나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하면서, ‘총무님아, 이거 봐라, 나 잘 쏜다.’라고 중얼거리면서 소변을 봤다. 혼잣말을 속으로 하는 것이 아닌,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나 자신이 느껴졌다. 그게 우스워서 또 한 번 중얼거렸다.


“난 술을 먹으면 왜 혼잣말을 속으로 안 하고 밖으로 내뱉으면서 말하는 거지? 참 신기하다.”


 방광에 모여 있던 소변의 3분의 2가 밖으로 분출될 때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 들었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론 기억이 없다. 꿈도 꾸지 않았다. CCTV가 있었다면 꼭 확인해 보고 싶은 장면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화장실의 변기가 보였다. 그대로 벌떡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난 그때 내 성격을 제대로 알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놀라서 어쩔 줄 몰라 유난 법석을 떠는 성격은 아닌가 보다. 나의 몸을 그대로 두고 머리, 즉 이성을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왜 여기에 누워있지? 마지막 기억은 실실 웃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며 소변을 본 기억이다. 지금 나의 자세는 옆으로 누워서 자는 자세, 즉 새우 자세다. 난 새우 자세로 여기에 잠들었다가 눈을 떴다. 잠들었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 술 인생에 한 번도 화장실에서 잠든 적은 없다. 필름이 끊겼다 해도 늘 남들은 내가 필름이 끊겼는지 모를 정도로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다만 실실 웃으며 말이 많아진 것 빼고는. 그렇다면 난 여기서 잠든 것이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마지막 내 몸의 기억이 떠오른다. 머리가 핑 돌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난 지금 여기에 새우 자세로 누워있다. 그렇다. 난 어떤 몸의 작용으로 인해 기절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누워있다.


기절한 것이라면... 공포가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한다. 기절을 한 것이라면 소변보다가 그대로 쓰러졌다는 말이다. 가장 먼저 나의 고추의 상태와 안부가 궁금해졌다. 일단 느낌으로 판단해 보려 했지만 그 녀석은 어떠한 신호도 주지 않아 감지가 안 된다. 시각을 사용해야 한다. 다행히 그 녀석을 확인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지는 않는다. 살짝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그 녀석은 수줍게 날 보며 인사한다. 하나는 확실해졌다. 그 녀석이 팬티 속이 아닌, 바깥에 나와 있는 상태라면 난 정말 기절한 게 맞다. 기절하는 순간 바지를 올리는 기가 막힌 순발력, 혹은 쓰러지는 순간에 어떠한 물리적 상호작용이 기적처럼 일어나 저절로 그 녀석이 속옷 안으로, 혹은 바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나 보다. 그 녀석의 적나라해서 안쓰러운 모습은 나의 기절에 강력한 증거로 작용했다. 그 녀석을 꼼지락거리며 만져본다. 늘 힘이 없었기에 오늘도, 지금도 정상이다.



 

 이제는 몸을 확인할 차례다. 가장 먼저 머리다. 사실 머리 먼저 확인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본능은 머리 보단 종족번식이 우선인가 보다. 놀라운 이기적 유전자다. 내가 그 녀석을 확인하는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된 점으로 보아 현재 머리, 즉 머리 안에 있는 뇌에는 어떠한 손상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외상을 살펴볼 차례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만져본다. 앞에서 뒤로, 좌에서 우로. 머리 뒤 오른쪽 부근에 피로 추정되는 액체가 손에서 감지된다. 눈앞으로 가져온다. 피 맞다. 다시 온몸으로 머리의 부상 정도를 느껴보려 노력한다. 나는 지금 머리가 아픈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 아프다. 머리에 피가 나는데, 머리가 안 아프다는 이런 모순은 무엇일까? 혹시 고통을 감지하는 뇌 부분이 손상된 것일까? 그래서 고통을 못 느끼는 건가? 아니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뺨을 꼬집어 봤다. 아프다. 고통을 감지하는 통각 수용체와 그 고통을 뇌로 전달하는 모든 시스템과 뉴런도 다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그리고 젠장 꿈도 아니다. 출혈이 그리 심하지는 않다. 다시 손을 피가 난 머리 쪽으로 향한다. 더 힘을 주어 만져보니 살짝 쓰리다. 다행히 큰 손상은 아니다. 이제 몸의 다른 부분을 알아봐야 한다. 몸을 하나씩 움직여 봐야 한다. 일단 오른손과 오른팔은 정상. 몸을 움직여 바로 눕는다. 이 과정에서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옷이 알 수 없는 액체로 한껏 젖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왜 남자들은 한 걸음 더 바짝 소변기에 다가가지 않는 거지? 난 바짝 다가서서 볼일을 봤다. 이 와중에도 소변기를 향해 한 걸음 더 전진했던 나의 기절 직전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자랑스러워하며 고시원 총무를 떳떳하게 볼 수 있음에 자부심을 느낀다. 등과 허리 쪽이 새롭게 차가워진다. 슬쩍 짜증이 밀려오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옷에 오줌 묻었다고 역정을 낼 타이밍이 아니다. 허리도 정상. 두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본다. 허벅지, 무릎, 발목, 발가락 다 정상이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온몸을 눈으로 확인한다. 별 다른 이상 징후가 확인되지 않는다. 완전히 일어선 후, 화장실 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내 시각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사각지대, 얼굴을 바라본다. 실핏줄이 터져서 두 눈이 다 빨갛게 충혈됐다. 정상이다. 술 먹고 일어난 날은 항상 그랬다. 피가 화장실 바닥에 살짝 묻어있다. 화장지를 세 칸 뜯어 바닥을 닦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후시딘을 꺼내 머리카락에 묻지 않게 애써가며 상처 부위에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사건이 일어났고, 어느 정도 사건이 수습되었다. 이제 이 사건의 원인을 살펴볼 시간이며, 짜증이든 뭐든 감정을 폭발시킬 타임이다. 현재 시간 새벽 4시 30분. 잠든 시간은 대략 2시.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화장실에 누워있었다는 말이다. 두 시간 동안 고시원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설마 내가 거기에 누워있는데 ‘주무시는구나’ 하며 나를 배려해, 조용히 볼일만 보고 간 사람이 있을까? 한편으로 내 고추를 세상에 내 보인채로 누워있었던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만약 내가 크게 부상이라도 입어서 촌각을 다투는 치료가 필요한 응급상황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골든타임을 놓쳐 꼼짝없이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온몸이 떨렸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어차피 나 한 명 죽어도 별 탈 없이 세상은 돌아간다. 부모님께는 한없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크라테스도, 세네카도 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자가 최고의 바보라 했다. 정작 내가 두려웠던 것은 내 시신의 모양새다. 고추를 내놓은 채, 새우 자세로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는 시신. 영 모양새가 좋지 않다. 스타일이 살지 않는다. 이제는 장기 기증의 의사를 나타내는 카드에 다음의 문구도 함께 적어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저의 마지막 자세가 고추를 내놓은 상태라면, 부디 그 녀석을 바지 안으로 집어넣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굳이 손으로 안 하셔도 되고, 주변에 있는 도구를 이용하셔도 됩니다. 힘들겠지만 부탁드립니다. 나머지 장기는 편하게 쓰세요. 쓸 만한 게 없겠지만.”



 

 서러움이 몰려왔다. 처음으로 혼자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침대에 누워 오로지 내 감정만을 읽어내려 노력했다. 솔직하게 나에게 물어봤다. 왜 우냐고. 난 대답했다.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친구 A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A는 고추 노출 사건에 대해서는 작게 웃었고,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는 ‘정말 괜찮으냐’며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A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일에, 육아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마음이 걸렸었다고 말했다. 요즘 들어 나랑 밥 한 끼 같이 먹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말했다. 다 이해했던 일이다. 같이 병원에 가자고 했다. 가기 싫었다. 검사하면 분명히 작은 병이 아닌 큰 병을 발견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워 가기 싫었다. A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듣고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날 밤, 고시원으로 돌아와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내 몸 상태를 확인해 봤다. 별 이상이 없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더 마시지는 않았다. 새벽에 소변감이 들어 잠이 깼다. 어제보다 더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또 기절하면 어떡하지? 낮에는 볼일 볼 때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이제는 술이 들어간 상황이다. 화장실로 향했다. 바지를 내린다. 아차 하며, 한 걸음 더 소변기에 다가선다. 소변을 보기 시작한다. 3분의 1 가량이 분출되고 있다.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큰일이다. 심장도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순간 소변을 끊고 그 녀석을 팬티 안으로 넣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절할 준비를 했다.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충격에 대비했다. 살고는 싶었나 보다. 점점 더 어지러움이 몰려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화장실 벽에 기댔다. 다행히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더 이상 어지럽지 않을 때까지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오줌을 바지에 지리면서. 술을 끊어야 하나.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인생이, 내 인생인데.





다음날, 옆자리의 그녀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나도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녀의 모나리자 미소는 항상 반갑다. 이내 미소가 사라지고, 간곡한 얼굴로 바뀐다. 전혀 억지스럽지 않아 사랑스러워 그게 뭐라 할지라도 이미 난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저기. 저랑 병원 같이 가실래요?”


친구 A가 말했나 보다. 입이 싼 놈이다.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친구 A에게 왜 말했냐고 따져 물었더니, 오히려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먼저 와서 물어보더라. 옆에서 너 보니까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지. 한 번 쓰러졌었다고.”


 '그래도 하지 말았어 야지' 하고 말하며 화가 난 척, 싫은 척 연기했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사람이다. 그 정도 연기는 기본이었다. 싫지 않은 이 감정은 무엇일까? 고시원 화장실 고추 노출 기절 사건을 통해 난 외로움을 직시했다. 외롭지 않고 싶어 친구 A에게 먼저 다가가 털어났고, 평소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던 그녀는 나의 이상을 감지하고 친구 A가 물어봤고, 결국 친구 A는 그녀에게 내 사건을 낱낱이 알렸다. (고추 노출 사건도 말했다고 한다. 미친놈이다.)



 

 홉스는 이 세상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며 선천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주장했다. 다분히 일리 있는 말이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홉스보다 루소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며 공감과 연민이라는,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능력을 통해 세상을 이상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 국면은 타인이 나를 위해 관심을 가지고 공감을 해주고 있는 루소적 세상의 단면이며 거기 한 중심에 내가 존재한다.


 고시원 화장실 고추 노출 기절 사건 전의 나는 고집불통인 네안데르탈이었다. 저기 무리 지어 사냥하며 삶을 영위하는 호모 사피엔스와는 어울리기 싫었다. 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도 이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동굴로 들어갔고, 섬으로 들어갔다.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울타리를 쳤고. 혼자서 웅클이고 있었다. 고집불통 네안데르탈은 그렇게 고립됐고, 결국 외롭게 멸종했다.


 용기 있는 네안데르탈도 있었다. 멀리 떨어져서 지켜만 보던  네안데르탈은 어느 순간 용기를 내어 호모 사피엔스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호모 사피엔스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 대던 네안데르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그렇게 네안데르탈은 호모 사피엔스하나가 되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네안데르탈은 사피엔스의 연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녀는 나에게 연민을 느꼈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로서의 관심, 바로 옆자리 사람을 관찰하며 고통을 살피는 지극히 호모 사피엔스적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말이다. 나는 고추를 내놓고 혼자서 기절했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깨어났다. 그러한 관심, 연민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친구 A와 그녀는 내가 엄청난 양의 출혈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귀여운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동굴 밖으로, 섬 밖으로 나와 도움의 손길을 내민 나에게 그녀는 함께 병원에 가자고 말했다.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따뜻함의 근원에 대해서. 설마.


 건방지게도 그것이 제발 나를 향한 사랑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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