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고통을 대결하는 것이다.
누가 더 힘들었고, 내가 경험한 고통은 이 정도라는 서로 고통의 순위를 매기는 것 말이다.
고통의 순위는 고통의 경중으로부터 나온다.
뭐 확실히 바늘에 찔린 사람보다는 칼에 찔린 사람이 고통이 중한 것은 사실이다.
왜, 미스터 선샤인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지 않은가? 누구나 제 손톱에 바늘이 찔리면 아프다고 한다, 그러나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 앞에서는 칭얼거리지 말아야지 라는 대사. 근데 이 대사가 정확한지는 모른다.
어떤 고통은 견딜만하고, 어떤 고통은 뼈가 사무치게 아프다.
모든 고통이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누가 더 고통을 깊게 경험했는가 메달 매기는 것은 불필요하다.
고통에 순위를 나열하지 말자.
그럼에도 생기는 고통의 깊고 얕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아주 진부 한 이야기다.
나는 그 사실을 꽤나 신뢰한다.
상처를 입는 고통은 다른 고통을 겪는 이를 치유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고통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치유해야 하는 게 맞다.
고통에 매달을 메기지 말고, 본인의 아픈 상처가 너무나도 깊다면 혹여나 그 깊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면 다른 상처 입은 자를 안아주도록 하자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자녀를 잃은 부모의 상처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자의 마음은 깊은 상처로 얼룩진다.
그렇기에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경험을 한 자가 다른 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하나님이야 말로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통의 대표자로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지고 가는 어린양이야 말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