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토트,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
존 스토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원 재학 시절이었다. 여러 가지 책을 공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학적 흐름과 견해와 상관없이 여러 학자를 보았다. 그 중에 나를 사로잡은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자는 바로 존 스토트였다. 이번 책과는 상관이 없긴 하지만 그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확신”이라는 두 권의 책이 나를 이끌어 주었다. 두 저서 모두 훌륭한 신학적 주장을 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나의 기본적인 생각을 더욱 체계화 시켜주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로 믿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봐야한다.
이번 책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은 다른 책에 비해서 탁월한 면이 있다. 내용의 근거와 자신의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면을 저술해가는 과정이 탄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인 이라면 익숙한 웨슬리의 산상수훈에 관한 설교와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에 관한 설교를 비교해보면서 읽게 되었다.
앞서 나눈 내용처럼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일반적인 삶과 동일한가? 존 스토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반적인 삶과는 다른 구별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선언에 따라 살 때에 진정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선언은 무엇인가? 존 스토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산상수훈이 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자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을 기준으로 할 때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말씀에 마음을 두고 있는 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종교사회학적인 개념으로 종교가 사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을 세속화라고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을 예언자적 역할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또는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지를 진단하는 것이 우선이다. 확실히 오늘날 사회는 종교에 관하여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사회가 가지는 종교에 대한 태도를 탈종교화를 넘어서 무종교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가 아마 윤리와 도덕에 관한 개인의 견해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것을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 가까울수록 선한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죄다. 어떤 면에서는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관한 모든 것이 결국 자아의 견해이므로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이든 루터든 우리의 자유는 곧 죄를 지을 자유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우면 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악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철학적 견해가 언제나 신앙에 들어오는 법이다. 가장 좋은 예시가 니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기독교적 윤리의 기초인 선과 악을 호와 불호로 탈바꿈시킨다. 그 말을 다시하자면 선과 악은 옳음과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좋음과 나쁨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후에 계속해서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견해는 바뀌게 되지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으로, 자기에게 좋지 않은 것은 악으로 해석하게 되는 경향성이다.
사회는 단순하지 않으므로 좋은 게 마냥 좋은 것일수 없고 또한 나쁜 건 마냥 나쁘기만 하지 않을 수 있다. 현장으로 들어와서 경험을 할 때 느끼는 것은 항상 좋은 사람은 없고 항상 나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여론은 나쁜 사람을 존재부터 글러먹은 사람으로 말하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아야 하기 때문에 그가 언제 나쁜 짓을 할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여론에 따라 가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해석하기를 존 스토트의 이번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앞서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존 스토트는 분명 자신의 저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명목상의 교회와도 세속적인 세상과도 달라야 하며, 종교적인 사람들과 비종교적인 사람들과도 달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여론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함이 옳다.
그런 점에서 언젠가 담임목사님의 말씀선포 가운데 마음의 울리던 내용이 하나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자신이 미워하는 자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와도 되는가? 와도 좋은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와야 한다!는 선포의 내용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여론에서는 미운 사람은 밉게 보고 좋은 사람은 좋게 보자는 차원에서 우리가 판단하는 선과 악이 곧 자신의 호와 불호의 차원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 따라서 세상은 교회에 이끌림을 받는다. 결코 교회가 세상의 이끌림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교회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곧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한계를 인정하자는 말이다. 앞서 선과 악의 명확한 문제를 좋음과 나쁨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취향이 확고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개인의 취향은 너무나 다양하고 모호해서 무엇을 판단하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해석의 문제이기에 인간이 온전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역시 온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성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취향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오로지 주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이번 책은 산상수훈이 우리에게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나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 문화에 순응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아마 여기서 세상 문화에 순응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 문화와 단절하여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수행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순응하지 말 것은 우리의 행동과 말과 가치관과 시선의 근거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라는 것이며, 다른 문화는 그저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꾸준하게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하기를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존 스토트는 이러한 지점에서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이교도의 기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있는 본질적 차이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있다. 다른 신들은 기계적인 주문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기도를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위선적이고 기계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정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가 또는 다른 무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면이다.
존 스토트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신을 섬겨야 할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을 섬겼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을 섬기고 있다.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에 의하면 세상이 발전하면서 인류의 종교성이 사라진 것이 아닌 종교성이 변화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을 타자로 두면서 섬기던 형태가 단지 내면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현대인은 자기만의 신을 섬기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여전히 인류의 종교성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비종교인과 대화한다면 자신은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아마 그 말의 뜻이 실제로 신앙한다는 면에서 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리처드 니버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는 5가지로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세상이 요구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한다는 폴 틸리히의 주장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산상수훈이 세상과 신앙의 사이에서 어떤 대답을 내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대답은 문화와 역설 관계가 아닌 오히려 문화를 뒤바꿀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존 웨슬리는 산상수훈에 관한 자신의 설교에서 “현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한 것들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좋게 보여도 하나님께는 혐오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선포한다. 존 스토트 역시 ‘의’에 관한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기만적인 신앙의 형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을 돌아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일반적인 모습이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일반적인 모습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하기에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 신앙을 재단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사실상 답은 아주 명확하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존 스토트의 주장은 사실상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동일하게 주장했었다. 예를 들면 본회퍼나 바르트 같은 사람이 있을 터이다. 기독교를 종교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흐름과 별 다르지 않고 모든 이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동일하게 가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빼놓고자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존 스토트는 기독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벗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산상수훈에서 찾고자 한다.
삶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그리스도인은 구별되어야 하는가? 왜 신앙을 유지해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대답은 ‘답변’이 아니라 ‘선포’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끊임없이 질문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선포는 그렇지 않다. 세상에 순응하지 말 것,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다르다는 것 이 역시 우리는 가슴에 품어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가슴에 머물 수 있도록, 나의 존재가 되도록,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이 우리에게 삶을 이끄는 유일한 길이 되도록 말이다.
이번 책,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은 그런 점에서 희미해져 가는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좋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기독교인이 꼭 읽어봄으로 말미암아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다시금 떠올려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