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율의 비밀
초보 부모들이 육아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목욕입니다. 저도 목욕이 항상 어렵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아가를 물속에 넣어서 씻긴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렇지만 목욕을 피할 수는 없는 일, 유튜브를 여러 번 돌려보며 시뮬레이션을 해 봅니다.
용기를 내서 목욕을 시킬 결심을 하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일단 창문을 닫아서 방 온도를 평소보다 높여줍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나왔을 때 추울 수 있기 때문이죠. 다음으로 아기가 갈아입을 옷과 기저귀, 방수매트와 수건을 준비합니다. 아, 깜박 잊었네요. 미리 아기 배를 채워둬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아기가 울고 보챌 수 있거든요.
그리고 아기 욕조에 물을 받고 온도를 잽니다. 적정한 온도는 씻김 물이 38도, 헹굼물이 40도라고 합니다. 정확한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물을 채운 뒤 미리 온도계로 물의 온도를 잽니다.
온도계 측정 버튼을 누르니 삐~ 소리와 함께 36도가 표시됩니다. 뜨거운 물을 더 섞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손을 넣어보니 36도 라기엔 느껴지는 물의 온도가 낮습니다. 확인해 보니 온도계가 체온 측정 모드로 되어 있네요. 사물 온도 측정 모드로 다시 물 온도를 맞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들 목욕을 시킵니다.
목욕을 마치고 갑자기 호기심이 생깁니다. 체온 측정 모드와 사물 측정 온도는 뭐가 다른 걸까?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한 뒤 찬물을 조금씩 섞어가면서 두 가지 모드로 측정해 보기로 합니다.
사용한 온도계는 휴비딕 써모 파인더 HFS-900입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욕실물을 가장 뜨겁게 해서 가득 채운 후, 가장 차가운 욕실물을 부어가며 체온 모드와 사물 모드로 측정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40도 부근에서 약 1도 정도 차이가 나다가 온도가 낮아질수록 그 차이가 커지네요.
여기에는 방사율이라는 적외선 온도계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적외선 온도계는 이름 그대로 적외선 에너지를 측정하여 온도로 변환하는 겁니다. 적외선은 빛의 일종인데,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더 길지요. 모든 물체와 생물은 자신이 가진 온도에 따라 적외선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온도가 높으면 많이, 낮으면 적게 방출하지요. 이때 물질에 따라 동일한 온도에서 방출하는 적외선의 양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A라는 물체는 100도에서 적외선을 100만큼 방출하지만, B라는 물체는 100도에서 적외선을 95만큼 방출하는 거죠. 이걸 방사율이라고 합니다. 두 물체를 그대로 측정하면 같은 100도지만 B는 95도로 측정되지요.
피부와 물은 이 방사율이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앞서 실험해 본 것처럼 아기 온도를 측정하는 체온계로 물의 온도를 측정하면 다른 값을 표시하게 되는 거지요. 문헌마다 값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피부는 0.98, 물은 0.95~0.98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방사율이 체온 측정 모드에서는 피부에 맞게 , 사물 측정 모드에서는 사물에 맞게 세팅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두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사물마다 방사율이 다 다를 텐데 어떤 수치를 사용하는 걸까요? 낮은 온도로 갈수록 왜 두 가지 모드의 차이가 크게 발생하는 걸까요? 이것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힌트는 있습니다. 체온 측정 모드는 범위가 42.5~32도 이고 사물 측정 모드는 100~0도입니다. 체온은 36.5도를 기준으로 변화가 크지 않으니까 좁은 범위를 가장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게 아닐까 싶어요.
내친김에 한 가지 실험을 더 해보았습니다. 사물 측정 모드로 같은 온도일 거라 생각되는 다른 물체를 측정해 보는 겁니다. 온도 변화가 가장 작은 화장실의 화장지 거치대와 타일 온도를 측정해 보았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인접한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온도는 거의 같을 겁니다. 측정 결과는? 스테인리스일 거라 짐작되는 거치대가 27.6도, 세라믹이 주성분일 타일이 25.0도이네요. 자료를 찾아보니 스테인리스는 방사율이 0.1, 세라믹이 0.9 ~ 0.95 정도입니다. 사물 측정 모드를 이용할 때에도 방사율로 인한 온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네요.
결론입니다. 체온계로는 사물의 정확한 온도를 측정할 수 없으니 용도에 맞는 온도계를 사용하셔야 합니다. 참고로, 모든 측정기기는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온도를 측정하는 경우에는 더욱 차이가 많이 납니다. 체온을 잴 때 부위마다 온도가 다른 걸 경험해 보셨을 거에요. 정확하게 물의 온도를 맞추고 싶으면 목욕물 전용 온도계를 구매하시는 게 좋습니다. 조금 덜 민감한 부모라면 팔꿈치를 물에 넣어서 따뜻하게 느껴질 때 목욕을 시키셔도 되겠죠? 저는 집에 있는 온도계로 사용해서 적당하게 물 온도를 맞출 생각입니다.